[비엔나 1] 도착 첫날 밤, 지하철 표 한 장 때문에 걸었다

비엔나에서 산 첫 표. 1회권 2.2유로, 각인기에 찍힌 시각은 20시 34분
비엔나에서 산 첫 표. 각인기가 `30.Wo Do 20:34`를 찍어줬다
비엔나 여행기 · 1편
밤 8시 34분,
표 한 장으로 이 도시에 들어왔다.
그런데 엉뚱한 역에서 내렸다.
표를 한 장 더 사기가 아까워서,
배낭을 멘 채 한 시간 반을 걸었다.

비엔나에서 나는 아무 계획이 없었다.

그때까지 한 달 넘게 유럽을 돌면서 계획이라는 걸 세워본 적이 없다. 숙소에서 만난 사람들이랑 떠들다 보면 "거기 좋더라", "거긴 돈 아깝더라" 하는 말이 쌓이고, 그러면 다음 날 갈 데가 저절로 정해졌다. 그게 내 여행 방식이었다.

그런데 비엔나에서는 그게 안 됐다. 도착한 밤에 방을 열었더니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나는 침대에 앉아서 새벽 1시까지 혼자 이 도시를 검색했다. 이 여행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결과가 이상하다. 비엔나는 이 여행에서 사진이 제일 많이 남은 도시가 됐다. 사흘 동안 614장. 로마도 부다페스트도 이만큼은 아니다.

그 사흘이 어디서 시작됐냐면, 2.2유로짜리 종이 한 장이었다.

표를 사고 나서야 도시에 들어왔다

부다페스트에서 탄 버스가 국경을 넘는 동안 창밖은 계속 들판이었다. 해가 낮게 걸린 마을을 몇 개 지나쳤고, 비엔나에 닿았을 때는 이미 저녁이었다. 낯선 도시에 밤에 떨어지면 할 일이 하나로 줄어든다. 숙소까지 가는 것. 그것만 되면 그날은 성공이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터미널을 나와 제일 먼저 찾은 건 표 파는 기계였다. 그날 산 표는 지금도 사진으로 남아 있는데, `1 Fahrt`라고 적혀 있다. 한 번 타는 표라는 뜻이다. 정가 2.2유로, 종이 아래쪽에 `Wien 100`. 하루짜리도 며칠짜리도 있는 걸 알고 있었지만 사지 않았다. 그날 밤의 나는 내일 어디를 갈지도 안 정한 상태였다. 갈 데를 모르는 사람이 정기권을 살 이유는 없었으니까 딱 한 번 갈 만큼만 샀다.

각인기에 넣었다

표 한 장으로 들어선 지하철 승강장
개찰구가 없다. 파란 기둥에 표를 넣고 그냥 걸어 들어간다

표를 손에 쥐고도 한참 서 있었다. 개찰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 지하철에는 막아선 문이라는 게 아예 없고, 대신 승강장 들어가는 길목에 파란 기둥이 하나 서 있다. 빨간 화살표와 함께 `Bitte entwerten`이라고 적혀 있는데 표를 넣으라는 뜻이다. 넣으면 날짜와 시각이 찍혀 나온다. 내 표에는 `30.Wo Do 20:34`라고 찍혔다. 30주차 목요일 20시 34분.

그러니까 나는 비엔나에 20시 34분에 들어온 셈이다. 그 전까지는 그냥 버스에서 내린 사람이었다.

문이 없는 개찰구가 그날 밤 내내 이상했다. 아무도 확인을 안 하는데 다들 알아서 표를 찍고 들어갔다. 검표원이 사복으로 불시에 돈다는 건 나중에 알았고, 그날은 그저 이 사람들 참 신기하다고만 생각했다.

노선도를 네 장 찍었다

지하철 계통도. 지하에서도 보려고 찍어뒀다
지하에서는 신호가 안 잡히니까 미리 찍어둔다. 이 여행 내내 도시마다 반복한 행동이다

승강장에 서서 벽에 붙은 노선도를 찍었다. 한 장으로 부족해서 네 장을 찍었다. 전체 지도 한 장, 지하철 계통도 한 장, 확대해서 두 장. 지도 앱을 켜면 될 일인데 굳이 이러고 있었던 건 데이터가 아까워서였고, 무엇보다 사진으로 찍어두면 지하에서도 볼 수 있어서였다. 신호 안 잡히는 데서 꺼내 보려고 찍은 것이다.

이 습관은 여행 내내 갔다. 도시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노선도를 찍었고, 종이 지도를 얻으면 그것도 찍었다. 잃어버려도 폰에는 남아 있으니까. 지금은 아무도 이렇게 안 하겠지만 그때 배낭여행자한테는 이게 꽤 합리적인 짓이었다.

주머니에서 어제가 나왔다

표를 넣으려고 주머니를 뒤지다가 종이 한 장이 같이 딸려 나왔다.

가방에서 나온 부다페스트 마트 영수증. 단위가 포린트다
가방에서 나온 전날 영수증. 단위가 포린트다. 아침까지 헝가리에 있었다

부다페스트 마트 영수증이었다. 숫자 뒤에 `Ft`가 붙어 있었다. 포린트다.

그날 아침까지 나는 헝가리에 있었다. 공용 주방에서 베이컨을 고추장에 볶아 먹었고, 같은 방을 쓰던 친구들과 작별 사진을 찍었고, 남은 현금을 털어서 이 영수증을 만들었다. 그게 열몇 시간 전 일이다. 국경을 넘었다는 게 이럴 때 실감난다. 표지판이 바뀌어서도 아니고 검문을 받아서도 아니고, 주머니에 어제 쓰던 돈의 흔적이 아직 있는데 여기서는 그게 아무 쓸모가 없어서.

버리지 않고 사진을 찍은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때 이미 알았던 것 같기도 하다. 이 여행이 언젠가 되돌아볼 것이 된다는 걸.

잘못 내렸고, 오기로 걸었다

여기서부터 꼬였다.

비엔나 전철에는 승강장에 서기 전에 전광판으로 방향을 미리 확인해야 하는 구간이 있는데, 그걸 모르고 탔다가 엉뚱한 데서 내렸다. 다시 타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그러려면 표를 또 사야 했고, 방금 한 장 쓴 참에 2.2유로를 더 내려니 그게 그렇게 아까웠다. 하루 숙박비를 생각하면 잘못 탄 값으로 내기엔 큰돈이었다.

그래서 걸었다. 순전히 오기였다.

밤 9시 반의 비엔나. 크레인과 멀리 타워 불빛
손이 흔들렸다. 삼각대도 없었고 배낭도 메고 있었다

밤 9시가 넘은 시각에 처음 온 도시를 배낭 메고 걸었다.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트램이 지나가는 걸 보고, 공사 중인 구역을 지났다. 크레인 몇 대가 하늘에 걸려 있었다. 도시가 통째로 낯설 때 걷는 건 좀 이상한 경험이다. 어디로 가는지는 아는데 뭐가 나올지는 모른다. 지도에 찍힌 점을 향해 가고 있으니 길을 잃은 건 아닌데, 눈에 들어오는 것 중에 이름을 아는 게 하나도 없다.

그러다 강이 나왔고, 그 너머로 탑 하나가 불을 켜고 서 있었다.

강 건너 불을 켜고 서 있던 탑
이름을 모른 채 찍은 불빛. 이게 도나우타워라는 건 이틀 뒤 낮에 알았다

저게 뭔지 몰랐다. 그냥 이 도시에서 제일 높아 보이는 게 저기 있구나 하고 한 장 찍었다. 이게 도나우타워이고 내가 이틀 뒤에 그 아래까지 걸어가게 된다는 건 그때는 당연히 몰랐다. 첫날 밤에 이름 모르고 찍은 것이 나중에 이름을 갖는 일이 여행에서는 종종 있다. 그러면 그 사진이 두 번 찍힌 것처럼 된다. 한 번은 모르고, 한 번은 알고.

표를 각인한 게 20시 34분이고 숙소 방 사진이 22시 15분이다. 그 사이 한 시간 반이 통째로 이 걷기다. 그날 찍은 야경 사진은 전부 흔들려 있다. 삼각대도 없었고 손도 안정적이지 않았다. 그래도 안 지웠다. 2.2유로 아끼려고 걸었던 길이 결국 그날 밤 본 것의 전부가 됐으니까.

방문을 열었더니 인사를 받았다

그날의 2층침대
붉은 커튼, 2층침대, 바닥에 놓인 배낭. 그날 밤의 전부다

숙소는 2층침대가 놓인 방이었다. 사진 한 장이 남아 있는데 붉은 커튼과 침대 두 개, 바닥에 놓인 내 배낭이 전부다.

방에 이미 사람이 있었다. 문을 여니까 그쪽에서 먼저 인사를 건넸다. 이름도 어디서 왔는지도 지금은 기억이 안 난다. 다만 먼저 인사를 받았다는 것만 남아 있다. 이 여행에서 계속 반복된 일이다. 방문을 열면 누군가 있고 대개 그쪽이 먼저 말을 건다. 부다페스트에서도 그랬고 그 전 나라들에서도 그랬다. 도미토리라는 게 그런 인사를 기본값으로 만들어 둔 방식인 것 같았다.

이 사람들이 이탈리아에서 온 셋이라는 건 다음 날에야 알았고, 이틀 뒤 아침에는 나란히 서서 같이 사진을 찍게 된다.

새벽 1시까지 도시를 벼락치기했다

침대에 앉아서 노트를 폈다. 그리고 새벽 1시가 되도록 비엔나을 공부했다.

이 여행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전까지는 숙소에서 만난 사람들이랑 떠들다 보면 관광 코스가 저절로 익혀졌다. 어디가 좋더라, 거기는 돈 아깝더라, 그런 말을 주워 담으면 다음 날 동선이 나왔다. 그런데 이 방에서는 그게 안 됐다. 처음으로 아무 도움도 못 받았고 계획도 없었다.

그래서 혼자 했다. 뭐가 있는지 찾고, 어디가 어디 근처인지 지도에서 맞춰보고, 순서를 정했다. 2박 안에 다 보고 싶으니 일정이 저절로 빡빡해졌다. 새벽에 노트를 덮으면서 든 생각이 하나 있었는데, 그게 좀 기분이 좋았다. 이제 누가 없어도 되겠구나. 이동도 하고 밥도 챙기고 지도도 볼 줄 안다. 여행자 완성체 비슷한 게 되어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벼락치기가 다음 사흘을 정했다. 다 못 볼 거면 내가 끌리는 것만 줄로 꿰자. 그게 결론이었다.

비엔나 대중교통 표 사는 법

⚠️ 요금 체계가 최근에 바뀌었다. 예전 여행기에 나오는 48시간권·72시간권은 없어졌다. 아래는 개편 이후 기준이다.

비엔나 대중교통은 지하철(U-Bahn)·트램·버스가 하나의 요금 체계로 묶여 있다. 1회권은 갈아타는 것까지 포함해 한 방향으로 계속 이동할 수 있다. 되돌아오면 새 표가 필요하다.

언제 유리한가
1회권3.20유로 (앱·온라인 3.00)하루 2번 이하
24시간권10.20유로하루 4번 이상
7일권(7 Days VIENNA)28.90유로사흘 넘게 머물 때
31일권75.00유로한 달 체류

48·72시간권은 폐지됐다. 2박 3일 일정이면 24시간권을 두 장 사거나(20.40유로) 7일권 한 장(28.90유로)을 쓰는 셈인데, 이동이 잦으면 7일권이 오히려 편하다. 계산이 애매하면 하루 세 번 이상 탈 것 같은 날만 24시간권을 사는 게 무난하다.

종이표는 반드시 각인해야 한다. 승강장 입구의 파란 기둥(`Bitte entwerten`)에 넣어 시각을 찍는다. 앱으로 산 표는 구매 시점에 유효해지므로 따로 할 일이 없다.

개찰구가 없다고 그냥 타면 안 된다. 검표원이 사복으로 불시에 돈다. 무임승차 과태료도 최근에 올라서 현장 즉납 135유로, 14일 내 납부 145유로다. 1회권 마흔 장이 넘는 값이다.

값은 비엔나 교통공사 공식 사이트에서 다시 확인하는 게 안전하다.

비엔나 시티카드는 사는 게 이득일까

숙소에서 자주 권하는 게 비엔나 시티카드인데, 이건 통합 입장권이 아니라 교통권에 할인쿠폰을 묶은 것이다. 명소는 대개 몇 유로씩만 깎인다.

계산은 단순하다. 교통권 값을 빼고 남는 금액만큼 할인을 실제로 쓸 수 있느냐를 보면 된다. 하루에 미술관 두세 곳을 도는 일정이면 값을 하고, 나처럼 걸어 다니면서 무료인 곳 위주로 보는 일정이면 그냥 교통권이 싸다.

비엔나은 표를 안 내는 데가 유독 많은 도시다. 광장, 묘지, 강변, 정원. 이건 이 시리즈를 다 쓰고 나서야 알았다.

야간 도착 숙소 이동

밤에 도착하는 일정이라면 세 가지만 미리 해두면 된다.

첫째,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역 이름을 출발 전에 적어둔다. 주소보다 역 이름이 실전에서 훨씬 빠르다. 둘째, 막차 시각을 확인한다. 비엔나 지하철은 평일 자정 무렵 끊기지만 금·토는 24시간 운행하고, 끊긴 뒤에는 야간버스(N선)가 대신 다닌다. 셋째, 표를 미리 사둔다. 도착해서 기계 앞에 서면 언어도 낯설고 뒤에 줄도 선다.

밤에 처음 보는 도시에서는 목적지를 하나로 줄이는 게 좋다. 그날의 목표는 관광이 아니라 침대다.

다녀와서

비엔나에서 산 첫 표를 아직 갖고 있습니다. 2.2유로짜리 종이 한 장인데 여행 내내 모은 것들 중에 유독 이게 남았어요. 잘못 내려서 한 시간 반을 걸었던 표라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다음 편은 쇤브룬 궁전입니다. 아침 일찍 갔는데 정작 오래 붙잡힌 건 건물 안이 아니라 정원이었어요. 가짜 폐허를 일부러 지어놓은 걸 보고 한참 서 있었습니다.

이 시리즈는 90일 동안 23개 나라를 돌았던 배낭여행 기록입니다. 비엔나은 그중 사흘이고 열세 편으로 씁니다. 이제 와서 쓰는 이유는, 사진을 정리하다가 그때 찍어둔 표랑 영수증이 그대로 나와서예요. 그게 아니었으면 아마 안 썼을 겁니다.

SERIES
비엔나 여행기 · 전 1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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