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몇 번이고 지나친 광장이 밤에는 다른 곳이 되어 있었다

중앙묘지에서 시내로 돌아오니 해가 지고 있었다. 숙소에 들어가 잠깐 누웠다가 다시 나왔다.

실전 정보가 급하면 바로 내려가도 된다 — 빈 필름 페스티벌 정보 보기 →. 우선은 그 광장부터.

낮에는 그냥 지나가는 자리였다

시청 앞 광장은 그날 하루에만 몇 번을 지나쳤는지 모른다. 박물관에서 국회의사당으로 갈 때 지났고, 다시 반대로 갈 때 지났고, 트램을 갈아타면서 또 지났다.

낮의 그 광장은 그냥 넓은 공터였다. 벤치가 몇 개 있고 사람들이 앉아 있고 그게 전부였다. 스크린이 서 있는 건 봤지만 무대 설치 중인가 보다 하고 지나쳤다.

라트하우스플라츠, 낮의 한산한 벤치
낮의 라트하우스플라츠 — 그냥 지나가는 자리였다

밤에 다시 나왔다

밤의 국회의사당

밤 9시가 넘어 링을 따라 걸었다. 박물관 건물들이 조명을 받아 낮과 완전히 달라 보였다. 국회의사당 앞에서는 맥주 한 캔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그날 처음으로 앉아서 뭔가를 마신 시간이었다.

그러다 시청 쪽으로 갔더니 광장이 사라져 있었다.

시청사 앞 필름페스티벌, 저녁의 인파
같은 광장, 밤 — 사람으로 덮여 있었다

한가운데 대형 스크린이 켜져 있고 그 앞으로 사람들이 바닥에 앉아 있었다. 스크린 양옆으로는 천막을 친 음식 부스가 줄지어 서 있었고, 그 사이가 사람으로 꽉 차 있었다. 낮에 벤치 몇 개뿐이던 자리였다.

입장료를 받는 데가 없었다. 그냥 들어가서 앉으면 되는 구조였다.

스크린에 사람이 혼자 춤을 추고 있었다

그날 걸린 건 영화가 아니었다.

화면 가득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배경은 아무것도 없는 밝은 벽이었고, 그 앞에서 혼자 춤을 췄다. 무용 공연을 찍은 영상이었다. 음악에 맞춰 몸을 접었다 펴는 동작이 이어졌다.

짧은 영상 하나가 남아 있는데, 화면을 올려다보며 찍은 10초짜리다. 흔들리고 어둡다.

*스크린을 올려다보며 찍은 10초*

무슨 작품인지는 지금도 모른다. 그런데 그날 광장에 앉은 사람들은 그걸 조용히 보고 있었다. 영화도 아니고 콘서트도 아니고, 무용 영상을 밤에 광장에서 여럿이 보는 자리였다.

대형 스크린과 관객, 어두워진 광장
스크린 앞에 앉은 사람들

나무 아래에서 하프 소리가 났다

나무 아래에서 하프를 켜던 사람

돌아가려고 트램 정류장으로 걷는데 소리가 들렸다.

가로수 아래에 사람이 하나 앉아 하프를 켜고 있었다. 악기가 사람보다 컸다. 옆에 접이식 손수레가 놓여 있었는데, 저걸로 이 큰 걸 끌고 왔구나 싶었다.

트램을 기다리며 듣는 하프 소리가 감미롭다.

방금 스크린으로 공연을 보고 나온 참이라 그 소리가 유난히 다르게 들렸다. 같은 밤에, 광장에서는 대형 스크린으로 공연을 틀고 그 밖에서는 누가 하프를 켜고 있었다.

이게 그 도시의 여유였다

그날 밤에 든 생각은 분명했다. 이 사람들은 문화를 즐길 여유가 있구나.

평일 밤인데 광장이 사람으로 가득 찼고, 다들 돗자리도 없이 그냥 바닥에 앉아 있었고, 끝나면 각자 흩어졌다. 특별한 행사에 온 얼굴이 아니라 평소에 하던 걸 하러 나온 얼굴이었다.

2015년의 나는 그게 부러웠다. 우리나라에는 저런 게 잘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다시 생각하면 그 비교는 정확하지 않았다. 지금의 한국에도 이런 자리가 널려 있다. 여름이면 한강에서 영화를 틀고, 광장에서 공연을 하고, 사람들이 바닥에 앉아서 본다. 무료이고, 평일이고, 끝나면 흩어진다.

그때 내가 본 건 유럽의 특별함이 아니라, 도시가 그 정도로 여유로워졌을 때 생기는 풍경이었던 것 같다. 다만 2015년의 나는 그걸 몰랐고, 그래서 그 밤이 더 크게 남았다.

돌아오는 길에 간판 하나를 봤다

태권도장 간판. 세계태권도연맹 엠블럼이 붙어 있다

숙소 근처에 다 왔을 때 노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KORYO`. 그 아래에 태권도라고 적혀 있었고, 옆에는 세계태권도연맹 엠블럼이 붙어 있었다. 도장이었다.

한참 서서 봤다. 낯선 도시 밤거리에서 아는 단어를 만나면 이상하게 반갑다. 그것도 이런 시간에.

그날 하루가 궁전·미술관·박물관·묘지·광장으로 채워진 뒤에 마지막으로 본 게 이 간판이었다. 다음 날 오후에 나는 이것과 이어지는 다른 걸 보게 된다.

빈 필름 페스티벌

시청 앞 광장의 야외 상영은 매년 여름 열린다. 7월 초부터 9월 초까지 이어지고, 입장은 무료이고 예약도 필요 없다. 상영은 해가 완전히 진 뒤 시작하니 여름에는 밤 9시가 넘어야 화면이 켜진다. 그해 일정은 공식 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프로그램은 영화보다 공연 실황이 많다. 오페라·클래식·재즈·팝·발레 실황이 걸리고, 일요일 밤에는 빈 국립오페라극장 공연 녹화본을 튼다.

저녁의 빈 국립오페라극장
빈 국립오페라극장 — 일요일엔 이곳 공연 실황이 광장 스크린에 걸린다

의자는 있지만 부족하다. 앞쪽 좌석은 일찍 차니 늦게 가면 바닥에 앉게 된다. 여름밤이라도 늦으면 서늘하니 얇은 겉옷 하나는 챙기는 게 좋다.

광장을 둘러싼 음식 부스는 낮부터 밤 11시까지 연다. 상영만 보고 갈 게 아니라면 저녁을 여기서 해결해도 된다. 다만 축제 물가라 슈퍼마켓보다는 비싸다.

다녀와서

이날 하루에 여섯 군데를 갔다. 그런데 지금 빈을 떠올리면 이 광장이 먼저 나온다.

돈을 안 낸 곳이었다. 표를 끊고 들어간 궁전과 박물관보다, 그냥 앉으면 되는 광장이 더 오래 남았다.

다음 편은 다음 날 아침이다. 같은 방을 쓰던 사람들과 사진을 찍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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