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구시가를 반나절 걸었는데 뭘 봤는지 헷갈린다

전날 여섯 군데를 돌고 잔 다음 날 아침이었다. 9시가 넘어서 일어났다.

아침에 사진을 한 장 찍었다

같은 방을 쓰던 사람들과

방에 같이 자던 사람들과 사진을 찍었다. 넷이 침대에 걸터앉아 웃고 있는 사진이다.

이틀 전 밤 내가 문을 열었을 때 먼저 인사를 건넸던 사람들이다. 셋은 이탈리아에서 왔다고 했다. 하루를 같이 보낸 것도 아니고 이름을 제대로 외운 것도 아닌데, 이틀 만에 같이 사진을 찍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날 밤 수첩에 이름 세 개를 적어뒀다. 지금 그 페이지를 다시 보면 이름만 있고 얼굴이 안 붙는다. 그래도 적어둔 걸 보면 그때는 잊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게스트하우스에서는 이런 게 자주 있었다. 이 여행 내내 그랬다. 어디를 가나 방을 같이 쓰는 사람들이 잘해줬고, 그러다 보면 즐거운 일이 생겼다. 그날 아침도 그중 하나였다.

녹색 돔이 있는 문

미하엘 문. 녹색 돔이 얹혀 있다

지하철을 타고 구시가로 들어갔다. 역에서 올라오니 바로 광장이었고, 앞에 녹색 돔이 얹힌 문이 서 있었다.

호프부르크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왕궁이 하나의 건물이 아니라 도시 한 구역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어서, 그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여러 개 있다. 문 양옆에 근육질 조각상들이 붙어 있고 아래에는 분수가 있었다.

여기서 셀카를 세 장 찍었다. 각도만 다른 세 장이다.

광장이 계속 나왔다

문을 지나니 또 광장이었고, 그 광장을 지나니 또 광장이었다.

요제프 광장에는 말 탄 사람 동상이 있었고, 영웅광장에는 말 탄 사람 동상이 두 개 있었다. 그 앞으로 흰 건물이 반원을 그리며 서 있었다.

이날 찍은 사진을 지금 넘겨보면 비슷한 게 계속 나온다. 흰 건물, 기마상, 광장, 조각상, 다시 흰 건물. 어느 게 어느 광장이었는지 사진만으로는 구분이 안 된다.

거리 한가운데 탑이 서 있었다

구시가 안쪽 보행자 거리로 들어서니 길 한가운데 이상한 탑이 서 있었다.

구름 같은 덩어리 위에 사람들이 뒤엉켜 있고 맨 위에 금색 장식이 얹힌 형태였다. 흑사병이 지나간 뒤 세운 기념탑이라고 했다.

거리에는 사람이 많았고 양옆으로 상점이 이어졌다. 탑은 그 한복판에 그냥 서 있었다. 유물을 따로 울타리 쳐서 보호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에 그대로 두는 방식이 낯설었다.

그리고 대성당에 닿았다

슈테판 대성당

거리 끝에 대성당이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다. 좁은 상점 거리를 걷다가 시야가 트이면 거기 있다.

첨탑이 높아서 카메라에 다 안 들어갔다. 뒤로 물러나도 안 되고 각도를 눕혀도 안 됐다. 결국 올려다본 사진 여러 장을 찍었는데 전부 건물이 기울어져 있다.

지붕이 특이했다. 색색의 기와로 무늬를 짜 넣어서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안에 들어가서 위를 봤다

성당 안. 천장이 계속 위로 갔다
성당 안의 궁륭 천장

성당 안은 어두웠다. 기둥이 높이 올라가다가 천장에서 갈라져 그물처럼 얽혔다.

한동안 서서 위만 봤다. 목이 아플 때까지 봤다.

내부에서 찍은 사진이 열 몇 장 남아 있다. 천장, 스테인드글라스, 조각이 붙은 설교단, 금색 제단. 셀카도 몇 장 있다.

그런데 기억이 잘 안 난다

솔직하게 적자면, 이날 본 것들이 머릿속에서 잘 구분되지 않는다.

광장이 몇 개였는지, 어느 문으로 들어가서 어느 문으로 나왔는지, 어느 성당이 어느 성당이었는지가 뒤엉켜 있다. 사진을 보면 "아 여기 갔었지" 싶은데, 사진 없이 떠올리라고 하면 안 나온다.

이유는 알 것 같다. 유적이 너무 많았다. 한 도시에 왕궁과 대성당과 기념탑과 광장이 걸어서 5분 간격으로 있으면, 하나하나가 눈에 남을 자리가 없다. 다음 게 바로 나오니까.

전날 묘지에서 본 무덤들은 지금도 순서까지 기억난다. 그날은 볼 게 그것뿐이었기 때문이다.

많이 보는 것과 기억에 남는 것이 반비례한다는 걸 이 이틀에 나란히 겪었다.

구시가 반나절 코스

지하철로 헤렌가세나 슈테판플라츠 역에 내려서 시작하면 된다. 미하엘 광장 → 호프부르크 → 영웅광장 → 그라벤 → 슈테판 대성당 순서가 무리 없고, 전부 걸어서 이어진다. 왕복 없이 한 방향으로 흐른다.

성당 본당은 무료로 들어갈 수 있다. 다만 안쪽 구역과 탑, 지하 납골당은 각각 따로 요금을 받는다. 남탑은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고 북탑은 승강기를 쓴다. 미사 중에는 관람이 제한되니 시간을 확인하고 가는 게 좋다. 자세한 요금과 시간은 성당 공식 사이트에 있다.

반나절이면 충분하다. 이 코스는 실내 관람이 성당 하나뿐이라 오전에 끝난다. 오후 일정을 따로 잡을 수 있다.

한 가지 권하고 싶은 게 있다. 이 구간은 볼거리가 촘촘해서 다 담으려 하면 아무것도 안 남는다. 한 곳만 정해서 오래 있는 편이 낫다. 나는 그러지 않았고, 그 결과가 이 편이다.

다녀와서

이 편은 사진이 많은데 이야기가 적다. 그날 실제로 그랬기 때문이다.

기억나지 않는 걸 기억나는 척 쓸 수도 있었다. 성당 천장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다든가, 흑사병 기념탑 앞에서 역사를 떠올렸다든가. 그런데 그런 일은 없었다. 그냥 계속 걸었고 계속 찍었다.

이날 오후는 달랐다. 오후에는 딱 한 군데를 갔고, 그건 지금도 전부 기억난다.

다음 편이 그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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