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5] 링슈트라세 하루 완주, 점심이 오이 한 개였다

비엔나 여행기 · 5편
아침 7시부터 여섯 시간,
궁전과 미술관과 박물관을 돌았다.
그러고 나서 점심으로 먹은 게
오이 한 개였다.

박물관에서 나오니 오후 1시 반이었다. 아침 7시부터 움직였으니 여섯 시간을 걸은 셈이었다. 비엔나는 볼거리가 링이라는 둥근 도로 위에 줄줄이 꿰여 있다. 걸어서 5분 간격이라 안 갈 이유가 없어 보인다.

그게 함정이었다.

왜 이렇게 돌았느냐 하면

그날 계획이 대단했던 건 아니다. 궁전 하나, 미술관 하나, 박물관 하나를 시간 단위로 쪼개 넣은 것도 아니었다.

이유는 그냥 다 붙어 있어서였다.

비엔나 구시가는 링이라는 둥근 도로가 감싸고 있고, 이름난 건물들이 대부분 그 링 위에 늘어서 있다. 박물관에서 나와 조금 걸으면 국회의사당이고, 거기서 조금 더 가면 시청이고, 반대로 가면 오페라극장이다. 지도를 보면 하나씩 흩어져 있는 게 아니라 줄줄이 꿰여 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다음 것까지 가게 된다. 걸어서 5분인데 안 갈 이유가 없어 보인다.

그게 함정이었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흰 기둥이 늘어선 신전 같은 건물이 나왔다.

흰 기둥과 팔라스 아테나 분수
흰 기둥이 늘어선 신전 같은 건물. 계단 앞 분수 위에 투구 쓴 여신이 서 있다

계단 앞에 큰 분수가 있고 그 위에 투구를 쓴 여신상이 서 있었다. 나중에 알았는데 지혜의 여신 아테나다. 국회 앞에 지혜의 여신을 세워둔 것이 그때는 그냥 조각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면 꽤 노골적인 배치다. 건물 자체도 그렇다. 19세기에 지으면서 굳이 고대 그리스 신전 모양으로 만들었다. 민주주의가 그리스에서 왔다는 걸 건물로 말하는 방식이다.

국회의사당 앞. 표정이 점점 굳어간다
같은 자리에서 네 장을 찍었는데, 뒤로 갈수록 표정이 굳는다

여기서 셀카를 네 장 찍었다. 각도만 조금씩 다른 네 장이다.

사진을 지금 보면 표정이 점점 안 좋아진다. 첫 장은 웃고 있고 마지막 장은 그냥 서 있다. 그 네 장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아니다. 그냥 그 시점에 이미 다리가 무거웠고, 웃는 걸 네 번 반복할 힘이 없었던 것이다. 여행 사진에서 이런 게 종종 드러난다. 같은 자리 연사에서 뒤로 갈수록 표정이 풀리면, 그날 어디쯤에서 체력이 꺾였는지가 그 순서에 남는다.

국회의사당에서 집어 든 한국어 팸플릿
국회의사당에 한국어 팸플릿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입구 쪽에 안내 팸플릿이 놓여 있었는데 거기 한국어판이 있었다. 집어 들고 나니 건물이 조금 덜 어려워졌다. 이날 이런 일이 두 번 있었다. 아침에는 궁전에서 한국어 오디오가이드를 들었고, 오후에는 여기서 한국어 팸플릿을 받았다. 그때는 그냥 편하다고만 생각했다. 지금 보면 이건 편의가 아니라 신호였다. 어느 나라 관광 시설이 어떤 언어의 안내물을 두느냐는 그 언어를 쓰는 사람이 얼마나 오는지의 문제다. 그때 비엔나 국회의사당에 한국어판이 놓여 있었다는 건, 이미 그전부터 한국 사람들이 여기 계속 왔다는 뜻이다.

이 이야기는 다음다음 편에서 다시 나온다. 그때는 팸플릿이 아니라 한글 간판이었다.

지도를 펴 들고

같은 자리에서 한 장 더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지도의 어디인지 확인하고, 그 상태를 사진으로 남겼다

분수 앞에서 지도를 펴서 사진을 찍었다. 지도 위에 지금 서 있는 건물이 그려져 있는 각도로.

이건 이 여행에서 자주 하던 행동이다. 지금 여기가 지도의 어디인지 확인하고, 그 확인한 상태를 사진으로 남겨두는 것. 나중에 순서를 복원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실제로 그 사진들이 한참 뒤에 이 글을 쓰는 근거가 됐으니, 쓸모없는 짓은 아니었다.

마차가 지나갔다

링을 따라 걷다 보면 마차가 지나간다. 말 두 마리가 끄는 검고 붉은 마차에 관광객이 타고 있다.

한참 서서 봤다. 도로에 차가 다니는데 그 사이로 말이 걸어간다는 게 이상해서였다. 신호에 걸리면 말도 선다. 거기서 조금 더 가니 오페라극장이 나왔다. 정면이 공사 가림막으로 덮여 있어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사진을 한 장 찍고 지나갔다.

오이를 하나 샀다

결국 맥도날드에 들어갔다
오이 하나로는 안 됐다. 케첩이 공짜가 아니라는 것도 여기서 배웠다

오후 3시쯤 슈퍼마켓에 들어갔다.

밥을 제대로 먹은 게 없었다. 아침도 대충 먹고 나왔고 점심은 건너뛴 상태였다. 진열대를 돌다가 소시지 코너를 사진으로 찍었다. 종류가 벽 하나를 채우고 있었다.

오렌지를 통째로 넣으면 갈아서 담아준다
슈퍼마켓 소시지 코너
소시지만 벽 하나를 채우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사서 나온 건 오이였다

그런데 정작 사서 나온 건 오이 하나였다.

그 오이를 지도 위에 올려놓고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왜 오이였는지는 모르겠다. 싸고 물이 많고 그 자리에서 씻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배낭여행에서 자주 하던 선택이다.

조금 뒤에는 맥도날드에 들어가서 버거 세트를 먹었다. 오이 하나로는 안 됐던 것이다.

거기서 하나 배웠다. 케첩이 공짜가 아니었다. 계산대에서 따로 달라고 해야 하고 값을 받는다. 한국에서는 통에 담겨 있거나 원하는 만큼 집어 가는 것이라 이게 좀 낯설었다. 다 먹고 나서는 쟁반을 각자 치워서 정리대에 올려놓는 것도 다들 알아서 하고 있었다. 낯선 나라에서 뭘 배우는 건 대개 이런 자리에서다. 궁전 안내판이 아니라 패스트푸드점 계산대에서.

강 건너로 보이던 교회
보티프 교회. 이날 마지막으로 찍은 건물이다

결국 하나를 못 봤다

이날 나는 길 건너 미술사박물관에 들어가지 않았다. 자연사박물관 바로 맞은편이었고, 같은 광장이었고, 걸어서 2분이었다. 나중에 스스로 이유를 붙이려고 했다. 다음에 또 오면 되니까 안 들어갔다든가, 다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든가.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그냥 지쳤다. 아침부터 궁전 정원을 두 시간 걷고 미술관 하나를 보고 박물관에서 두 시간을 서 있었으면, 그날치 체력은 거기서 끝난 것이다.

대단한 여행 철학이 아니라 다리 문제였다.

여행기를 쓰다 보면 이런 대목에 의미를 붙이고 싶어진다. 안 간 것에도 이유가 있었다고. 하지만 안 간 건 그냥 안 간 것이고, 그날의 나는 오이 하나 사 들고 벤치에 앉아 있었다.

링슈트라세 걷는 법

링은 구시가를 한 바퀴 감싸는 순환 도로다. 전체를 걸으면 5킬로미터가 넘고, 국회의사당·시청·부르크테아터·대학·오페라극장이 이 위에 있다.

전부 걷지 않아도 된다. 트램 1번과 2번이 링을 따라 돌기 때문에, 걷다가 다리가 무거우면 아무 정류장에서나 타면 된다. 관광용 링 트램도 있지만 일반 트램이 같은 길을 훨씬 싸게 돈다. 교통권이 있으면 추가 요금 없이 탈 수 있다.

하루에 넣을 실내 관람은 두 곳까지가 현실적이다. 링 위 건물들이 가까워 보여서 계속 이어 붙이게 되는데, 실내 관람은 한 곳에 최소 한 시간 반씩 걸리고 서서 보는 시간이 길다. 세 곳째부터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한여름에는 그늘과 물이 관건이다. 링은 가로수가 있지만 광장 구간은 완전히 트여 있다. 슈퍼마켓이 곳곳에 있으니 음료는 편의점 대신 슈퍼에서 사는 게 훨씬 싸다.

링에서 뭘 보고 뭘 지나칠까

링 위 건물은 대부분 밖에서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안에 들어갈 값을 하는 건 몇 개 안 된다.

들어갈 만한 것

  • 국립오페라극장 — 공연을 안 봐도 가이드 투어가 있다. 무대 뒤와 객석을 도는 40분짜리이고 한국어 회차가 있는 날도 있다.
  • 미술사박물관 — 회화가 목적이면. 반나절이 필요하다.

밖에서 봐도 되는 것

  • 국회의사당 — 정면 계단과 팔라스 아테나 분수가 전부다. 내부 투어는 예약제이고 정치 건축에 관심이 있어야 값을 한다.
  • 시청(라트하우스) — 여름이면 앞 광장이 축제장이라 건물보다 광장이 볼거리다.
  • 부르크테아터·대학 — 지나가며 본다.

돈 안 드는 게 많다. 폴크스가르텐(장미원)·부르크가르텐·영웅광장은 전부 무료이고 그늘이 있다. 링을 걷다 지치면 여기 벤치에 앉는 게 정답이다.

관광 마차는 얼마인가

링을 걷다 보면 피아커(Fiaker)라고 부르는 관광 마차가 계속 지나간다. 말 두 마리가 끄는 검은 마차다.

값은 20분 코스가 80유로 안팎, 40분 코스가 150유로 안팎으로 형성돼 있다. 마차 한 대 기준이라 인원으로 나누면 부담이 줄지만, 혼자면 비싸다.

타기 전에 알아둘 게 있다. 여름 폭염일에는 동물 보호를 위해 운행이 중단된다. 기온이 35도를 넘으면 마차가 멈추도록 규정돼 있다. 이 규정이 생기기까지 논쟁이 길었고, 지금도 마차 운행 자체를 두고 시민 사이에 의견이 갈린다.

나는 타지 않았다. 그냥 서서 한참 봤다. 도로에 차가 다니는데 그 사이로 말이 걸어가고, 신호에 걸리면 말도 선다는 게 이상해서였다.

비엔나에서 싸게 배 채우기

이날 내 점심은 오이 하나였고 저녁은 맥도날드였다. 지금 같으면 이렇게 안 한다.

슈퍼마켓이 답이다. 빌라(BILLA)·슈파(SPAR)·호퍼(HOFER)가 곳곳에 있다. 빵·치즈·과일·요거트로 한 끼가 3~5유로면 된다. 계산대 옆에서 파는 레베르케제 젬멜(고기빵 샌드위치) 같은 것도 싸다.

비엔나에는 소시지 노점(Würstelstand)이 있다. 케제크라이너·부렌부어스트 같은 걸 빵과 함께 5유로 안팎에 판다. 밤늦게까지 열고, 서서 먹는다. 관광지 식당보다 싸고 현지 음식이다.

단, 슈퍼마켓은 일찍 닫는다. 평일 저녁 7~8시면 문을 닫고 일요일은 아예 안 연다. 이걸 모르면 일요일 저녁에 굶는다. 늦게까지 여는 건 기차역 안 매장과 소시지 노점 정도다.

수돗물을 마셔도 된다. 비엔나 수돗물은 알프스에서 끌어온 것이고 그냥 마신다. 거리 곳곳에 식수대가 있다. 생수를 사 마실 이유가 없다.

다녀와서

지금도 여행 첫날에 무리하는 습관이 있다. 붙어 있으면 이어서 가게 된다.

그날 이후 하나 정한 게 있다. 실내는 오전에 하나, 오후에 하나. 그 이상은 표를 사도 못 본다. 이건 지금까지도 지키고 있다.

이날의 오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친 상태로 나는 시내를 벗어나 좀 엉뚱한 곳으로 갔다.

붙어 있으면 이어서 가게 되는 게 여행인데, 그날 이후로는 실내를 하루에 두 곳까지만 넣습니다.

다음 편은 그 오후의 나머지예요. 지친 상태로 시내를 벗어나 좀 엉뚱한 곳으로 갔습니다.

SERIES
비엔나 여행기 · 전 1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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