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페스트 세체니 온천, 도착 당일에 간 건 내 선택이 아니었다

세체니 온천 야외탕과 노란 궁전 건물
세체니 온천 야외탕 — 도착한 날 저녁 여섯 시 무렵

부다페스트에 도착한 날 오후에 바로 세체니 온천에 갔다. 짐을 풀자마자 나간 셈이다. 배낭여행에서 도착 당일은 보통 숙소 찾고 씻고 동네 한 바퀴 도는 데 다 쓰는데, 그날은 그걸 건너뛰고 도시 반대편 온천까지 갔다.

내가 부지런했던 게 아니다. 그건 내 계획이 아니었다.

숙소에서 한국인 동생 둘을 만났고, 그 둘이 여기 온천은 꼭 가봐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따라갔다. 그게 전부다. 만약 그 둘을 안 만났으면 나는 혼자서 세체니에 가지 않았을 것 같다. 아니, 그런 곳이 있다는 걸 아예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이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즐거운 저녁 중 하나가 됐다.

로마에서 아침에 도착했다

부다페스트 지하철 통로, 도착 당일 오전
부다페스트 지하철 통로 — 도착 당일 오전 열한 시

직전 도시가 로마였다. 비행기로 두 시간 남짓, 오전에 부다페스트 공항에 내렸다.

내려서 제일 먼저 느낀 건 온도였다. 로마의 7월은 걷는 것 자체가 노동이었는데 부다페스트는 선선했다. 보도가 넓고 지하철이 빨랐다. 첫 지하철 티켓이 530포린트였다. 로마에서 매번 유로를 1,500원으로 환산하며 계산기를 두드리던 습관이 하루아침에 필요 없어졌다.

숙소에 짐을 놓고 한숨 잤다. 일어나 보니 동생 둘이 온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영웅광장 바로 뒤가 온천이다

영웅광장 전경, 열주와 동상
영웅광장 — 반원형 열주 뒤로 걸어 들어가면 세체니다

이 동선은 알아두면 편하다. 지하철에서 나오면 영웅광장(Hősök tere)이 있고, 광장 뒤쪽 시민공원 안으로 조금만 걸으면 바로 세체니 온천(Széchenyi gyógyfürdő)이다. 둘을 따로 잡을 필요가 없다. 한 덩어리로 묶어서 반나절 코스로 쓰면 된다.

광장은 컸다. 반원형 열주가 양쪽으로 뻗어 있고 그 아래 왕과 정치인들의 동상이 줄줄이 서 있는데, 나는 그 사람들이 누군지 하나도 몰랐다.

영웅광장 반원형 열주 아래
열주 아래 — 사진 몇 장 찍고 바로 온천 쪽으로 걸었다

사진 몇 장 찍고 지나갔다. 목적지가 온천이었으니까.

이게 따라가는 여행의 특징이다. 내가 코스를 짰으면 광장에서 설명판을 읽고 동상 이름을 확인하며 한 시간을 썼을 것이다. 남을 따라가면 그 시간이 사라지는 대신, 원래 안 갔을 곳에 도착한다. 어느 쪽이 낫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날은 후자가 맞았다.

수영복이 없었다

세체니 온천 실내 로비의 조각과 타일
온천 안으로 들어가는 길 — 목욕탕이라기보다 궁전 로비 같았다

당연한 문제가 생겼다. 짐 풀자마자 따라나섰으니 수영복이 있을 리가 없었다.

세체니는 수영복 없이 못 들어간다. 결국 그 자리에서 샀다. 급하게 사는 물건에 가격을 따질 여지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고, 실제로 그랬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실용적인 말은 이것 하나다. 부다페스트 일정에 온천이 있으면 수영복은 한국에서 챙기거나 시내 마트에서 미리 산다. 온천 입구는 마지막 선택지다. 그리고 나처럼 도착 당일에 즉흥으로 따라갈 가능성이 있다면, 배낭 어딘가에 수영복 하나는 상시 넣어두는 게 낫다. 유럽에는 온천과 수영장이 생각보다 자주 등장한다.

건물 안은 목욕탕이라는 말과 안 어울렸다. 아치와 타일과 조각이 있는 로비였다. 1913년에 지어진 건물이고, 유럽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온천이라는 걸 나는 나중에 알았다.

손목의 파란 밴드

세체니 온천 락커룸의 열린 사물함
락커룸 — 파란 밴드를 여기에 대면 열린다

옷을 갈아입으면 손목에 파란 전자 밴드를 채워준다. 이게 락커 키다. 사물함 앞에서 밴드를 대면 열리고 닫힌다.

이걸 어떻게 쓰는 건지 처음에 알았느냐고 하면, 딱히 헤맨 기억은 없다. 락커룸에서 그냥 썼다. 지금 돌아보면 이게 세체니에서 가장 편했던 부분이다. 물속에 들어가면 열쇠를 어디 둘지가 항상 문제인데, 그 문제 자체가 없다. 방수 밴드 하나만 차고 다니면 된다.

한국 목욕탕에서 쓰는 열쇠 팔찌와 발상은 같다. 다른 건 이쪽이 전자식이라 번호를 외울 필요가 없다는 것 정도다.

뜨거운 온천이 아니었다

손목에 찬 파란 전자 밴드와 온천 물
파란 밴드를 찬 채로 — 물은 그냥저냥 따뜻했다

기대와 달랐던 게 하나 있다. 물이 안 뜨거웠다.

한여름이라 걱정을 좀 했는데, 실제로는 그냥저냥 따뜻한 정도였다. 한국 목욕탕의 열탕 같은 뜨거움은 없었다. 참고 앉아 있는 게 아니라 물속에서 계속 움직일 수 있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유가 있었다. 세체니의 실외에는 성격이 다른 탕이 여러 개 있고 온도가 갈린다. 50미터 수영장은 26~28도, 가운데 활동용 풀이 30~34도, 온천탕이 38도쯤이다. 사람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이 30도대 풀이고 우리도 거기 있었다. 내가 "그냥저냥 따뜻하다"고 기억한 물은 수영장 쪽 온도였던 셈이다.

그래서 세체니는 몸을 담그러 가는 곳이라기보다 물에서 시간을 보내러 가는 곳이다. 헤엄도 치고 걸어 다니고 이야기하다가 한 시간이 지나간다. 실제로 우리는 여섯 시 십오 분쯤 락커에 옷을 넣고 일곱 시 이십 분쯤 나왔다.

한국 목욕탕과 무엇이 다른가

세체니 온천 실내탕의 아치형 창
실내탕 쪽 아치형 창 — 실내와 실외가 이어져 있다

솔직히 그날 무엇이 어떻게 달랐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온천 자체가 좋았다는 감각만 남았다.

다만 지금 기준으로 짚어보면 차이는 분명하다.

수영복을 입는다. 한국 목욕탕처럼 벗고 들어가지 않는다. 남녀가 같은 물에 있고 가족도 연인도 섞여 있다. 씻으러 온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세신 문화가 없다. 때를 밀거나 씻기러 가는 게 아니다. 실외 풀이 중심이라 수영장에 더 가깝고, 그래서 물속에서 체스를 두는 사람들 사진이 이 온천의 상징처럼 돌아다니는 것이다.

실내와 실외가 이어져 있다. 실내탕에서 아치 창 쪽으로 걸어 나가면 야외로 나온다. 한국 목욕탕에서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감각과는 다르고, 오히려 리조트 수영장 동선에 가깝다.

요금이나 티켓 종류는 내가 갔을 때와 지금이 다를 것이다. 이 글에서 가져갈 만한 건 영웅광장 뒤가 세체니라는 위치와 수영복이 필수라는 조건 정도다.

안 갔으면 몰랐을 곳

해가 기운 세체니 온천 외관
나올 무렵의 세체니 외관 — 해가 기울고 있었다

나와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노란 건물에 저녁 빛이 걸려 있었다.

이 편을 쓰면서 계속 걸리는 게 있다. 나는 이 저녁을 스스로 만들지 않았다. 도착 당일에 도시 반대편 온천까지 가자는 발상은 내 것이 아니었고, 수영복도 없었고, 광장 동상 이름도 몰랐다. 그런데 이 저녁이 부다페스트에서 제일 좋았던 시간 중 하나로 남았다.

배낭여행을 오래 하면 자기 취향이 굳는다. 나는 이런 걸 좋아하고 저런 건 안 맞는다는 판단이 빨라지고, 그 판단이 대체로 맞으니까 더 굳는다. 문제는 그 판단이 이미 아는 것 안에서만 맞는다는 점이다. 세체니는 내가 몰랐던 항목이었고, 그래서 내 판단으로는 절대 뽑히지 않았다. 이런 건 남이 밀어줘야 열린다.

그래서 그 뒤로는 숙소에서 누가 뭘 하자고 하면 웬만하면 따라갔다.

다음 편은 이날 밤이다. 온천에서 나와 조각피자를 하나 먹고 강으로 걸어갔는데, 거기서 이 여행에서 가장 오래 남은 야경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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