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 리옹 9] 트랙에서 만난 할머니가 몇 주 뒤 내 경로를 바꿨다
내 경로를 바꿨다.
핀란드행이 시작됐다.
다음 날에도 경기장에 갔다. 이번엔 혼자였다.
전날 하루 구경하고 나니 이 대회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이날 트랙 옆에서 핀란드에서 온 할머니를 만났다. 그 만남 하나가 몇 주 뒤 내 여행 경로를 바꿨다.
경기장은 도시 밖에 있었다
대회는 한 경기장에서 다 치르지 않는다. 리옹과 그 주변 도시 여러 곳에 나뉘어 열린다.
이날 간 곳은 리옹 남동쪽 베니시외라는 도시에 있는 경기장이었다.

세계대회라는 말에 큰 스타디움을 상상했는데 실제로는 동네 운동장에 가까웠다.


동네 육상장 수준인데 여기서 세계선수권이 열리고 있었다. 관중석도 몇 줄 없고 입장 절차도 없다. 그냥 걸어 들어가면 된다.

종일 트랙 옆에 있었다
이날은 허들 종목이 계속 있었다.


*펜스 너머로 본 트랙.*
경기 사이사이에 선수들이 트랙 위를 그냥 걸어 다닌다. 종목이 동시에 여러 개 돌아가서 트랙이 한가할 틈이 없다.
번호만 보면 어느 나라 몇 살대인지 알 수 있게 돼 있었다.


한 조가 끝나면 다음 조가 곧바로 들어섰다.


*그늘막 쪽에서 트랙을 봤다.*

몸 푸는 사람과 대기하는 사람이 트랙을 나눠 쓰고 있었다.


*경기와 경기 사이는 이렇게 느슨하다.*
13.42
트랙 안쪽에서는 도약과 투척이 동시에 진행됐다.

기록판에 네덜란드 국기와 이름, 그리고 13.42라는 숫자가 붙어 있었다.
숫자 하나만 놓고 보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런데 이 대회에서는 그 옆에 붙은 나이 그룹이 숫자를 다시 읽게 만든다. 같은 기록이라도 M40이 낸 것과 M65가 낸 것은 전혀 다른 사건이다.
그래서 이 대회의 전광판은 일반 육상 경기와 다르게 읽힌다. 순위표라기보다 나이별 대조표에 가깝다. 어느 나이대에서 몇 초가 나오는가, 그리고 그 곡선이 몇 살부터 꺾이는가.

트랙 종목과 필드 종목이 동시에 돌아갔다.


8월의 리옹은 낮에 서 있기가 힘들었다.


표를 따로 살 필요도 없었다. 펜스 밖에 서 있으면 다 보였다.


경기장 한쪽에 구급차가 상시 대기하고 있었다.

부상자가 적지 않았다. 예순, 일흔이 넘은 몸으로 전력 질주를 하고 허들을 넘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때는 그게 무모해 보였다. 다칠 걸 알면서 왜 저기까지 왔을까 싶었다.
지금은 순서를 반대로 본다. 다칠 수 있다는 걸 알면서 나오는 게 이 대회의 조건이다.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을 매년 기록으로 확인하면서도 다음 대회에 또 등록한다. 트랙 옆에 구급차를 세워두는 건 그걸 감안한 운영이지 사고가 아니다.

말이 안 통해도 사진은 찍는다
트랙 옆에 종일 서 있으니 사람들이 먼저 말을 걸었다.

메달을 목에 건 할머니가 나를 붙잡고 뭔가 한참 설명했는데 절반도 못 알아들었다. 그래도 사진은 찍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언어가 통해야 대화가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표정과 손짓과 사진 몇 장이면 충분한 순간이 있다.
핀란드에서 온 할머니
그중 한 사람이 마리아였다.

핀란드에서 왔다고 했다. 나이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일흔은 넘어 보였고, 그 나이에 세계선수권에 출전하러 혼자 프랑스까지 온 것이었다.

어디를 여행 중이냐고 묻길래 지도를 펴놓고 지금까지 지나온 나라와 앞으로 갈 나라를 짚어 보여줬다.
그러자 종이를 한 장 꺼내 뭔가 적더니 내 손에 쥐여줬다.

윗줄에 핀란드어로 두 마디가 적혀 있고, 그 아래 이름과 전화번호가 있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첫 줄은 "어디가 그렇게 급해?"라는 뜻이고, 둘째 줄은 "스트레스?"였다.
그날 내가 무슨 말을 했길래 저 두 마디를 적어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때 나는 아흔 날에 스무 나라 넘게 도는 일정을 짜놓고 매일 다음 도시를 계산하고 있었다.
핀란드에 오면 자기 집에 묵으라고 했다.
그래서 갔다
여행자들끼리 "놀러 와"는 그냥 인사다. 대부분 지켜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 경우는 지켜졌다.

리옹을 떠나고 스페인과 포르투갈과 영국을 지나 북유럽으로 올라간 뒤, 나는 실제로 핀란드 서부의 작은 도시로 가서 마리아의 집에 며칠 묵었다.
그 이야기는 한참 뒤 편에 나온다. 여기서는 트랙 옆에서 받은 쪽지 한 장이 그 시작이었다는 것만 적어둔다.
여행 계획이라는 건 대개 이렇게 어긋난다. 그리고 어긋난 쪽이 대체로 더 좋은 이야기가 된다.
*트랙과 관중석*
*트랙에서 경기가 이어졌다*
이런 대회를 보러 간다면
입장 — 리옹에서는 절차가 아예 없었다. 걸어 들어가 관중석에 앉으면 됐다. 국제대회라는 이름과 달리 동네 육상장 분위기다.
어디에 앉나 — 결승선 쪽이 정석이지만, 이 대회는 트랙 안쪽이 더 재미있다. 도약과 투척이 동시에 돌아가서 고개만 돌리면 다른 종목이 보인다. 그늘막 아래 자리를 잡으면 반나절이 금방 간다.
시간대 — 오전에 예선, 늦은 오후에 결승이 몰린다. 한여름이면 정오 전후에는 경기 자체가 뜸해진다.
사진 — 선수들이 대체로 촬영을 반긴다. 다만 경기 직전의 선수에게는 말을 걸지 않는 게 예의다. 경기가 끝나고 트랙에서 나오는 순간이 가장 좋다.
말이 안 통해도 된다 — 이 글이 그 증거다. 나는 그날 영어와 손짓만으로 하루를 보냈고, 그 하루가 몇 주 뒤 여행 경로를 바꿨다.
다음 날에는 경기장에 가지 않고 시장과 부엌에서 하루를 보냈다. 리옹에서 제일 많이 한 일이 장보기였다는 얘기는 다음 편에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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