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 취리히 1] 물가가 제일 비싼 도시에서, 돈이 안 드는 곳은 호수였다

돈이 안 드는 곳을 찾았다.
거기서 오전을 다 썼다.
전날 밤 열한 시가 넘어 취리히에 들어왔다. 숙소까지는 걸었다.
스위스에서 돈을 안 쓰기로 한 게 그날 밤부터였다.
조식이 나오는 숙소였다

유스호스텔 같은 곳이었는데 조식이 나왔다. 시리얼 통이 놓인 코너에서 접시를 받아 왔다.
햄 몇 조각, 빵, 주스.
이 나라에서 이게 어떤 의미인지는 그날 저녁에 알게 된다. 아침에는 그냥 배부르게 먹었다.
호수까지 걸어갔다

교통비를 쓰지 않기로 했으니 걸었다.
숙소에서 호수까지 주택가를 통과했는데, 오르막이 몇 번 나왔고 길에 차가 거의 없었다.
집들이 낮고 창틀이 다 반듯했다. 도시 외곽인데도 관리가 안 된 곳이 안 보였다.
보트가 줄지어 묶여 있었다

호수 남쪽에 닿으니 개인 보트가 빽빽하게 묶여 있었다.
파란 덮개를 씌운 것들이 줄줄이 이어졌고, 그 뒤로 호수가 열렸다.

물색이 사진에서 보이는 그대로였다. 초록에 가까운 청록인데 탁하지 않다.
국기가 자주 보였다

선착장마다 스위스 국기가 걸려 있었다. 붉은 보트들이 나란히 매여 있고 그 위로 깃발이 하나씩.
잔디밭은 그냥 열려 있었다

호숫가를 따라 잔디밭이 이어졌다. 입장료도 없고 울타리도 없다. 사람들이 그냥 앉아 있거나 누워 있었다.
물가가 세계에서 제일 비싼 도시라는데, 그 도시에서 제일 좋은 자리가 공짜였다.
물이 바닥까지 보였다

물가에 앉아서 아래를 봤는데 바닥 돌이 하나하나 다 보였다.
발목 깊이만 그런 게 아니라 한참 나간 데까지 그랬다.
여기서 한참 있었다. 도시 한복판인데 물이 이렇다.
*호수 오리떼, 물이 바닥까지 다 보인다*
백조가 사람을 피하지 않았다

백조와 오리가 같이 있었다. 사람이 가까이 가도 도망가지 않았고, 오히려 이쪽으로 왔다.
새 쪽으로 카메라를 오래 들고 있었다. 이날 찍은 것 중에 이 근처 사진이 제일 많다.
*호수의 백조와 오리들*
팔을 든 동상이 있었다

호숫가 테라스에 청동상이 하나 서 있었다. 한쪽 팔을 하늘로 뻗은 자세라 멀리서도 눈에 들어왔다.

그때는 뭔지 모르고 찍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가니메데스(Ganymed) 상이었다.
조각가 헤르만 후바허가 만들어 1952년에 세웠고, 자리는 뷔르클리 광장의 호수 테라스다.
팔을 든 게 납치당하는 장면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올림포스로 오르고 싶어 하는 쪽이다.
독수리로 나타난 제우스에게 손을 뻗어 청하는 자세다.
발주 경위도 재밌다.
미술사학자 하인리히 뵐플린이 1942년에 조각가에게 편지를 보내 *"
취리히에는 여성 조각이 이미 많으니 남성 상을 하나 기증해달라"*고 청했다.
갈매기가 계단을 차지하고 있었다

선착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갈매기가 빽빽하게 앉아 있었다. 내려가려다 말고 사진만 찍었다.
배는 타지 않았다

유람선이 들어와 있었다. 여기가 호수 유람선 출발지다.
타면 좋았겠지만 그날 예산에는 없었다. 대신 선착장 끝까지 걸어 나갔다 왔다. 그건 공짜였다.

선착장 끝에서 보면 건너편 언덕까지 다 들어온다.
여기서 오래 앉아 있었다

호수 쪽으로 낮은 단이 놓여 있어서 사람들이 거기 걸터앉아 있었다. 나도 한참 앉아 있었다.
이 도시에서 내가 오래 머문 곳은 결국 여기다. 박물관도 전망대도 아니고 물가였다.
*호수의 아침, 오리와 요트*
*물이 얕아 바닥까지 보인다*
취리히 호숫가에서 돈 안 쓰고 보는 것
호숫가 산책로와 잔디밭은 전부 무료다. 뷔르클리 광장에서 양쪽으로 산책로가 이어지고, 중간중간 잔디밭과 앉을 수 있는 단이 놓여 있다.
입장료를 받는 구간이 없다.
가니메데스 상은 뷔르클리 광장의 호수 테라스에 있다.
유람선 선착장 바로 옆이라 배를 안 타도 지나가면서 볼 수 있다.
유람선(ZSG) 출발지도 같은 광장이다.
*정박한 요트들*
짧은 순환 코스부터 몇 시간짜리까지 갈리므로, 탈 계획이면 광장 매표소에서 코스별 시간표를 먼저 보는 게 낫다.
요금은 시기마다 달라진다. 현장 게시판에 붙어 있다.
린덴호프 언덕도 무료다. 구시가와 리마트강이 내려다보이고 24시간 열려 있다.
취리히 호수 가는 법
중앙역에서 호수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다.
트램을 타면 뷔르클리플라츠(Bürkliplatz) 정류장에서 내리면 바로 호수다.
ZVV 1일권은 1존 기준 성인 9.20프랑 선이고, 박물관까지 돌 계획이면 취리히 카드를 저울질해볼 만하다.
제일 좋았던 자리는 돈을 안 받았다
물가가 제일 비싸다는 도시에서 제일 좋았던 자리가 호숫가였다.
물가는 비쌌는데 예쁜 도시였다는 인상이 남은 건 이 오전 때문이다.
다음 편에서는 시내로 들어간다. 대학까지 걸어갔는데 밥값에서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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