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 스톡홀름 1] 20유로에 이동과 숙박을 한 번에 샀다, 발트해를 건넌 밤배
한 번에 샀다.
이 배에서 정점을 찍었다.
여행이 두 달째로 들어서면 돈 쓰는 방식이 바뀐다. 초반에는 아끼는 게 목표였다면, 후반에는 한 번에 두 가지를 해결하는 선택지를 먼저 찾게 된다. 투르쿠에서 스톡홀름으로 넘어가는 밤배가 딱 그랬다. 20유로짜리 표 한 장에 발트해를 건너는 열 시간과 하룻밤 잠자리가 같이 들어 있었다.
배 안에 도시 하나가 들어 있다


배에 오르자마자 든 생각은 '이게 배가 맞나'였다. 면세점이 있고 바가 있었다. 안쪽에는 공연장까지 딸려 있었다. 복도는 호텔처럼 길었고 층마다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핀란드를 떠나는 배답게 면세점 한가운데는 무민 차지였다. 인형, 컵, 가방, 열쇠고리까지 무민이 안 붙은 물건을 찾는 게 더 어려웠다.
무민은 핀란드에서 몇 번이나 마주쳤는데 끝까지 정체가 헷갈렸다. 생김새는 아무리 봐도 하마다. 그런데 설정상 트롤이라고 한다. 나는 그냥 외계인 설정인 걸로 정리하고 넘어갔다.
가격표에 유로와 크로나가 나란히 적혀 있었다.

핀란드는 유로를 쓰고 스웨덴은 크로나를 쓴다. 배는 그 사이를 밤새 건너가니까 두 통화를 다 받는다. 선반 앞에 서서 환율 계산을 하다가, 술 한 병 값이 내 배표보다 비싸다는 걸 깨닫고 조용히 손을 뗐다.
갑판에 올라가 있으면 값이 저절로 매겨진다

*군도를 지나며 남는 항적*
*항구를 벗어나자 갑판으로 올라갔다*
배가 항구를 벗어나자 곧장 갑판으로 올라갔다. 8월 말의 북유럽은 밤 열 시가 다 되도록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는다. 수평선 쪽만 붉게 남아 있고, 그 위로는 벌써 별이 보이기 시작하는 어중간한 시간이 한참 이어졌다.
배는 군도 사이를 천천히 빠져나갔다.

투르쿠 앞바다에는 섬이 수천 개 흩어져 있다. 배는 그 사이를 지그재그로 빠져나가는데, 낮은 섬들이 계속 스쳐 지나가서 바다라기보다 넓은 강을 거슬러 가는 느낌이었다. 난간에 팔을 걸치고 한참 서 있었다. 이 시간만으로도 20유로는 이미 값을 했다고 생각했다.
기다리는 동안 한국인 아주머니 몇 분과 이야기를 나눴다.

노르웨이 피오르드를 보러 가는 길이라고 하셨다. 아들 자랑과 선물 자랑을 한참 듣다 보니 배 시간이 금방 갔다. 그런데 정작 그분들도 피오르드는 포기하게 됐다고 했다. 그해 유로 환율이 계속 오르는 중이었고, 노르웨이 물가는 그 위에 한 번 더 얹혔다.
배값보다 비싼 술은 사지 않았다

보드카는 접었지만 그냥 넘어가지는 않았다. 배 이름이 찍힌 카바 한 병을 골랐다. 잔은 따로 없어서 플라스틱 컵에 따라 마셨는데, 그 조합이 오히려 이 배랑 잘 어울렸다. 안주는 배낭에 있던 과자였다.
아래층에서는 밴드가 연주를 시작했다.

밤이 깊어질수록 배 안이 시끄러워졌다. 발트해를 오가는 이 배들은 원래 술 마시러 타는 사람이 많다. 면세 주류를 싸게 살 수 있고, 밤새 놀다가 아침에 내리면 되니까 그 자체가 하나의 코스다. 나는 구경만 하다가 위층으로 올라왔다.
뜨거운 물이 오십 센트였다
라면을 먹으려고 카페에 물을 받으러 갔다. 뜨거운 물이 유료였다. 오십 센트라고 적혀 있었다.
그래서 찬물을 받아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그건 공짜였다.
저녁은 배낭에서 나왔다

배 안 식당은 뷔페식이라 값이 만만치 않았다. 대신 공용 공간에 전자레인지가 있었다. 배낭 깊숙이 넣어 다니던 신라면 컵을 꺼냈다. 한국에서부터 들고 다닌 게 아니라, 유럽을 지나오며 한인 마트나 다른 한국 여행자에게서 하나씩 얻어 모은 비상식량이었다.
컵라면을 들고 다시 갑판으로 나갔다.

아까까지 붉던 하늘이 그새 완전히 캄캄해져 있었다. 난간 위에 컵을 올려놓고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바람이 차서 오래 있지는 못했다. 선실로 내려와 짐을 정리하고, 다음 날 스톡홀름에서 뭘 볼지 대충 정한 뒤 누웠다.
아침 여섯 시 십팔 분, 스톡홀름

눈을 뜨니 배가 이미 항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짐을 메고 통로로 나가자 천장에 'Welcome to Stockholm'이 걸려 있었다. 시계는 아침 여섯 시 십팔 분이었다.
체크인까지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이 도시에 주어진 시간이 하루뿐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배를 타려면
탈링크 실자라인 공식 페이지 기준으로 투르쿠-스톡홀름 항로는 지금도 화요일을 제외한 매일 운항한다. 저녁에 투르쿠를 떠나 이튿날 아침 스톡홀름에 닿는 야간편과, 아침에 떠나 저녁에 닿는 주간편이 나뉘어 있다. 야간편을 고르면 잠자리가 딸려 오니 숙박비를 한 번 아낄 수 있고, 주간편을 고르면 군도 풍경을 밝을 때 볼 수 있다.
객실은 창문 없는 최저가 선실부터 발코니 딸린 방까지 등급이 갈린다. 배낭여행이라면 최저가 선실로도 충분한데, 화장실과 샤워는 방마다 딸려 있다. 표는 공식 홈페이지에서 날짜와 객실을 골라 미리 예약할 수 있고, 성수기인 여름에는 당일 매표소보다 확실히 저렴하다. 시간표와 요금은 시즌마다 바뀌니 출발 전에 공식 페이지에 그날 값이 올라온다.
이 여행에서 가장 잘 쓴 돈을 하나만 꼽으라면
이 여행에서 가장 잘 쓴 돈을 하나만 꼽으라면 이 배표다. 여행 초반이었다면 아마 최단 시간 항공편부터 찾았다. 두 달을 넘기고 나서야 이동 시간을 손해로 세지 않게 됐다. 열 시간 동안 배 위에서 노을과 밤바다를 다 보고, 잠까지 자고 내렸으니 시간을 쓴 게 아니라 번 셈이다.
스톡홀름에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하루였다. 그 하루를 어떻게 썼는지가 다음 이야기다.
숙소 체크인을 기다리지 않고 배낭을 멘 채로 도시를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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