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 스완지 5] 영국 동네 펍, 아버지가 이미 앉아 있는 바로 갔다
이미 앉아 계셨다.

짐을 내려놓자마자 다시 나가자고 했다.
어디 가느냐고 물으니 아버지가 기다린다고 했다.
관광객이 갈 자리가 아니었다
차로 몇 분 안 가서 도착했다. 시내를 벗어나 물가 쪽 동네였다.
낮은 단층 건물이고 앞이 주차장이다. 간판이 크지 않고 관광 안내에 나올 만한 외관이 아니었다.
문을 여니 안이 이미 차 있었다.

테이블마다 사람이 앉아 있고 천장 가까이 깃발이 걸려 있었다. 다들 서로 아는 사이로 보였다. 문이 열릴 때마다 고개를 돌려 누가 왔는지 확인하는 분위기다.
여기는 술집이라기보다 동네 사랑방이었다.
한 파인트에 삼 파운드였다

바 카운터에 생맥주 손잡이가 줄지어 서 있었다. 손잡이마다 다른 브랜드가 붙어 있고 그 아래 값이 적혀 있다.
3.00파운드. 한 파인트 값이다.
잔이 컸다. 파인트는 570밀리리터쯤 되니까 한국 생맥주 500cc보다 조금 많다. 유럽 대륙에서 마시던 잔보다 한 번에 나오는 양이 확실히 많았다.

내가 받은 건 잉글랜드 남서쪽 양조장에서 만드는 에일이었다. 이름이 좀 험한데 콘월 해안의 모래톱에서 따왔다. 배가 자주 걸리던 자리라 그런 이름이 붙었다.
안주가 감자칩 한 통이었다

안주라고 나온 게 원통에 든 감자칩이었다.
59펜스. 40그램짜리 작은 통이다.
한국 술집 기준으로 보면 허전하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게 보통이다. 펍은 마시는 곳이고 먹는 건 따로다. 음식이 필요하면 아예 식사 메뉴를 시킨다.
아버지가 먼저 와 있었다

바 앞에 흰 폴로 셔츠를 입은 스튜어트가 서 있었다. 아버지는 우리가 오기 전부터 여기서 마시고 있었다. 아들이 데려온 동양인을 보고도 딱히 놀라지 않았다.
아는 사람이 계속 인사를 하고 갔다. 바 앞에 서 있는 몇 분 동안 대여섯 명이 지나가며 어깨를 치고 갔다.

이 집안은 이 동네에서 사십 년을 살았다. 그 시간이 이렇게 드러난다.
창밖이 물이었다. 창가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잔을 앞에 두고 그쪽을 보며 얘기하고 있었다.

안쪽에 당구대가 있었다. 그 옆으로 테이블이 이어졌다.

옆자리 아이가 말을 걸었다

펍에 아이가 있었다.
영국 펍은 시간대에 따라 아이를 데리고 올 수 있다. 밤이 되면 어른만 남지만 이른 저녁까지는 가족 단위가 섞인다.
안경 쓴 여자아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무슨 말인지 절반도 못 알아들었는데 사진은 같이 찍었다.
그러고 나서는 카메라를 두고 한참 놀았다. 아이가 렌즈를 들여다보면 내가 찍어주고, 화면을 같이 보다가 또 찍었다. 말이 안 통하는데 그 과정에는 통역이 필요 없었다.
아이 아버지도 같이 찍었다. 아이가 자기 아빠를 끌고 와서 나란히 세웠다.
이 집 손님이었다. 스튜어트네 친척도 아니고 그날 처음 본 사람들인데, 이 바에 있던 사람들이 대체로 그랬다. 낯선 동양인 하나가 끼어 있는 걸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아이는 주스를 마셨다. 그 테이블에 어른들 잔과 아이 잔이 같이 놓여 있는 게 이상하지 않은 자리였다.
벽에 걸린 게 웨일즈 국기였다

천장 가까이 깃발이 걸려 있었다. 붉은 용이 그려진 깃발이다.
영국 국기가 아니라 웨일즈 국기다.
깃발에 연도가 두 개 인쇄돼 있었다. 럭비 대회에서 전승 우승한 해들이다. 웨일즈가 유럽 6개국 대회에서 상대를 전부 이긴 시즌을 그렇게 기린다.
여기 사람들에게 럭비는 축구보다 위에 있다. 그날 낮에 축구장에 갔던 나로서는 순서가 반대인 셈이었다.
이 동네 펍 벽에 걸리는 건 웨일즈 국기다. 영국이 한 덩어리가 아니라는 걸 여기서 눈으로 봤다.
밖으로 나가니 해가 지고 있었다

한 잔 마시고 밖으로 나갔다.
펍 뒤가 바로 물이었다. 강이 바다로 빠지는 자리라 폭이 넓고, 그 위로 해가 내려가고 있었다.
배 한 척이 떠 있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시계를 보니 여섯 시였다. 8월의 영국은 아홉 시가 넘어야 어두워진다. 저녁이 길다는 게 이런 뜻이다.
울타리 앞에서 계속 찍었다

물가 쪽에 나무 울타리가 있고 그 앞에 피크닉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거기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는데 한 장으로 안 끝났다.
포즈가 점점 이상해졌다. 처음엔 나란히 섰다가, 다음엔 한 사람이 다리를 올리고, 그다음엔 서로 들어 올리려고 했다.

마지막에는 셋이 팔을 들어 모양을 만들었다. 해를 등지고 찍어서 얼굴이 다 까맣게 나왔다.

만난 지 다섯 시간쯤 된 사람들과 그러고 있었다.
영국 펍에서 처음 마실 때
바에서 직접 주문하고 그 자리에서 계산한다. 자리에 앉아 기다리면 아무도 안 온다.
파인트가 기본이고 절반인 하프 파인트도 시킬 수 있다. 처음이면 하프로 시작하는 게 낫다.
에일은 차갑지 않다. 지하 저장고 온도 그대로 나오는 게 정상이다. 미지근하다고 잘못 나온 게 아니다.
안주 문화가 없다시피 하다. 감자칩이나 견과가 전부고, 배가 고프면 음식 메뉴를 따로 시킨다.
동네 펍은 문턱이 낮다. 관광 펍보다 값도 싸고 말도 잘 붙여준다. 다만 혼자 들어가면 처음 몇 분이 어색하다.
계획에 없던 펍
이 도시에 오기 전에 잡았던 계획에는 펍이 없었다.
경기를 보고 숙소에서 자고 다음 날 런던으로 간다. 그게 전부였는데 다 무너져서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여행 계획표에 적히는 건 대개 이름이 있는 것들이다. 경기장, 성, 박물관. 이름이 없는 것은 적을 수가 없다.
그날 제일 오래 앉아 있던 자리에는 이름이 없었다. 물가에 있는 동네 바이고, 그 집 아버지가 늘 앉는 자리였다.
한 곳에서 끝나지 않았고, 세 번째 바에서 위스키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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