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 스완지 4] 웨일스에서 잘 데가 없다고 했더니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자기 집에서 자라고 했다.
서너 시간 전이었다.

선수 아홉 명과 사진을 찍고 나서 다시 차에 탔다.
여기서부터가 문제였다. 나는 그날 잘 데가 없었다.
차가 드라이브스루로 들어갔다
배가 고팠다. 그날 아침부터 제대로 먹은 게 없었다. 새벽에 공항 대합실에서 눈을 떴고, 비행기에서 뭔가 조금 먹은 게 전부였다.
차가 방향을 틀더니 드라이브스루로 들어갔다.
창문으로 봉투가 들어왔다. 노란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몸을 숙여 건네줬다.

봉투 안에 케첩이 있었다

봉투를 열었더니 붉은 케첩 봉지가 먼저 나왔다.
이 봉지 모양은 유럽 어느 나라를 가도 같다. 두 달 넘게 다니면서 이 로고를 몇 번 봤는지 모른다.
배낭여행자에게 이 체인은 기준점이다. 값이 얼마인지, 화장실이 있는지, 와이파이가 되는지. 나라마다 다른 게 이거 하나로 정리된다.
감자튀김을 차 안에서 먹었다. 종이 곽째 들고 하나씩 집었다.

무릎 위에 놓고 먹었다. 담요가 깔려 있는 뒷자리였다.

피클을 빼달라고 했다

내가 시킨 건 치즈버거였다. 피클을 빼달라고 했다.
영국에서는 이게 특별 주문으로 분류된다. 기본 조합에서 뭘 빼면 그 자리에서 새로 만들어야 해서 대기 줄에서 빠진다.
그래서 직원이 나중에 따로 들고 나왔다. 만들어놓은 걸 창구에서 건네는 게 아니라, 사람이 걸어 나와서 손에 쥐여준 것이다.
여행 두 달 넘게 하면서 남의 나라 규칙 때문에 곤란해진 적이 여러 번이었는데, 그 규칙이 이렇게 작동한 건 처음이었다. 까다롭게 굴었더니 오히려 대접을 받았다.
그 집에 묵게 됐다

차 안에서 잘 데가 없다는 얘기가 나왔다.
숙소 두 곳이 새벽에 취소됐다고 말했다. 비행기 안에서 알림을 봤고, 그때는 이미 손쓸 방법이 없었다고.
스튜어트가 자기 집에서 자라고 했다.
그날 처음 본 사람이다. 버스 노선을 물어보다 만난 사람의 남자친구고, 나는 그 사람 차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만난 지 서너 시간 됐다.
망설이지 않았다. 그 시점에 나에게는 잘 데가 정말로 없었다. 당일 예약이 되는 호텔을 찾아 들어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고, 영국 물가에서 그건 그날 예산을 통째로 날리는 선택이었다.
그래서 고맙다는 말부터 나왔다.
집에 도착했다. 거실 한쪽에 비닐 씌운 가구가 쌓여 있었다. 공사 중이거나 정리 중인 집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낯선 사람을 들였다. 준비된 손님방이 있어서 내준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들어가 보니 어수선한 것과 별개로 집이 포근했다. 도시 아파트보다는 시골집에 가까웠다. 카펫이 깔려 있고 선반에 물건이 빼곡하고, 어디에 앉아도 누가 오래 앉았던 자리 같았다.
여기서 사흘을 지냈는데 그 사흘이 이 여행에서 제일 편했다.
그날 밤 남긴 기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과장이 아니었다. 경기를 놓치고 숙소가 없어진 사람에게 그날 필요한 건 위로가 아니라 방 하나였고, 처음 본 사람이 그걸 내줬다.
거실 소파에 그 집 어머니가 앉아 있었다. 안나다. 아들이 데려온 동양인을 보고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인사를 하고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이분과는 이틀 뒤에 하루를 통째로 같이 다니게 되는데, 그건 한참 뒤 이야기다.

가방에 초콜릿이 있었다

배낭에 초콜릿 덩어리가 하나 있었다.
영국 물가가 비싸다는 말을 하도 들어서, 오기 전에 공항 면세점에서 사둔 것이었다. 값이 4파운드였는데 그때는 비싸다고 생각했다.
정작 그날은 얻어먹기만 했다. 초콜릿은 은박을 벗겨 한 조각만 떼어 먹었다.
이건 그 뒤로도 한참을 배낭에 들어 있었다. 비상식량으로 사놓고 비상이 안 온 것이다.
남의 집에 묵게 될 때
이건 계획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그날도 내가 부탁한 게 아니라 상대가 먼저 말했다.
다만 그런 제안이 나올 확률이 높아지는 조건은 있다. 길을 물어보는 것이 그 시작이었다.
지도 앱을 켜면 사람에게 물을 일이 없다. 그날 물어보지 않았으면 아무도 못 만났다.
받고 나면 갚을 방법이 마땅치 않다. 돈을 내겠다고 하면 대개 거절당한다. 할 수 있는 건 집안일을 거들고 가진 걸 나누는 정도다.
그리고 그 집 규칙을 빨리 익히는 게 제일 낫다. 신발을 어디서 벗는지, 물을 어디서 받는지, 밤에 어느 문을 닫는지.
뒤에서 두 단계가 무너졌다
그날 아침에 세운 계획은 다섯 단계였고 뒤에서 두 개가 무너졌다.
숙소가 없어졌고 경기를 놓쳤다. 그런데 저녁이 되니 방이 생겼다. 호스텔도 아니고 돈을 낸 것도 아닌, 남의 집 방 하나였다.
경로를 되짚으면 시작이 표 한 장이다. 표를 안 잃었으면 버스를 탔을 것이고, 그랬다면 정류장에서 헤어져 이 차에 탈 일도 없었다.
여행에서 실수가 이렇게 풀리는 경우는 드물다. 대개는 그냥 손해로 끝난다.
그날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날 밤은 아직 안 끝났다.
짐을 내려놓자마자 동네 바로 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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