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페스트 겔레르트 언덕에서 사진만 찍고 내려오지 않았다

겔레르트 언덕에서 내려다본 자유의 다리와 도나우강
겔레르트 언덕에서 본 자유의 다리 — 이 도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전망대에서 사람들이 하는 일은 대개 같다. 올라가서 사진을 찍고, 몇 분 서 있다가 내려온다.

이날 나는 좀 다르게 썼다. 가방에 원서 한 권을 넣어 올라가서, 앉아서 읽었다.

걸어서 4분이면 올라간다

언덕 아래 겔레르트 호텔 외관
언덕 아래 겔레르트 호텔 — 여기가 출발점이다

겔레르트 언덕(Gellért-hegy)은 부다 쪽 강변에 솟은 낮은 언덕이다. 자유의 다리 건너편, 겔레르트 호텔이 있는 자리에서 시작한다.

내 사진의 촬영 시각이 동선을 그대로 알려준다. 호텔 앞이 19시 21분, 오르는 길이 19시 25분, 정상 전경이 19시 26분이다. 호텔에서 정상까지 5분이 안 걸렸다.

이름에 '언덕'이 붙은 게 정확하다. 이름에 '언덕'이 붙은 이유가 있다. 부다페스트 전경을 보는 곳으로 어부의 요새와 이 언덕이 늘 같이 꼽히는데, 접근성으로 보면 여기가 훨씬 가볍다.

겔레르트 언덕으로 올라가는 흙길
오르는 길 — 나무 사이로 난 흙길에 난간만 붙어 있다

올라가는 길은 정비된 관광 계단이 아니었다. 나무 사이로 난 흙길에 난간만 붙어 있는 형태다.

그래서 오르는 동안 도시가 안 보인다. 나무에 가려 있다가 정상에서 한꺼번에 열린다. 나는 이 순서가 마음에 들었다. 케이블카로 올라가면 도시가 서서히 넓어지는데, 걸어 올라가면 마지막 몇 걸음에서 통째로 나타난다.

여신상을 역광으로만 찍었다

역광 속 자유의 여신상 실루엣
자유의 여신상 — 역광으로 실루엣만 남았다

정상에는 자유의 여신상(Szabadság-szobor)이 서 있다. 종려나무 잎을 두 손으로 높이 든 여성상이고, 강 건너 페스트 쪽에서 올려다보면 이 언덕의 표식처럼 보인다.

사진을 세어보니 이 여신상을 여러 장 찍었는데 대부분이 역광 실루엣이다. 저녁 일곱 시 반, 해가 여신상 뒤로 넘어가는 시각이었다. 정면으로 제대로 찍은 건 한 장뿐이다.

그날 뭘 해보려던 건지는 지금 정확히 모른다. 다만 실루엣만 여러 번 찍었다는 건 한 장으로 안 됐고 계속 시도했다는 뜻이다. 조리개도 노출 보정도 모르던 시절이라, 아마 화면을 보면서 각도만 바꿔가며 눌렀을 것이다. 결과는 전부 검은 덩어리로 나왔다.

지금 같으면 노출을 인물에 맞춰 두 장, 실루엣으로 두 장 나눠 찍을 것이다. 그런데 이 검은 사진들이 나쁘게 보이지 않는다. 역광에서 뭐가 안 되는지 모르는 채로 계속 눌러본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여기서 책을 읽었다

언덕 위에서 도시를 배경으로
언덕 위 — 이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

이 편의 중심이 여기다.

그날 가방에 영어 원서 한 권이 있었다. `퍼시 잭슨과 번개도둑` 아니면 `왕좌의 게임` — 둘 중 하나였는데 어느 쪽이었는지는 지금도 헷갈린다. 배낭여행 중에 원서를 들고 다닌 건 영어를 좀 붙여보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언덕에 올라 전경을 보고, 자리를 잡고 앉아서 그 책을 읽었다. 바람이 불었다.

이게 왜 오래 남았는지 생각해보면, 그 시간에 아무것도 소비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입장료를 내지 않았고 뭘 사 먹지도 않았고 다음 일정으로 이동하지도 않았다.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앉아 책을 읽은 것뿐이다. 여행 경비로 치면 0원짜리 시간인데, 지금까지 남았다.

배낭여행이 길어지면 하루하루가 이동과 입장으로 채워진다. 아침에 나가서 뭘 보고 뭘 먹고 어디로 넘어간다. 그 리듬 안에서는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이 낭비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90일을 돌고 나서 기억에 남은 장면 중 상당수가 그 낭비 쪽이었다.

다들 앉아 있었다

해질녘 언덕에 줄지어 앉은 사람들
해질녘 — 언덕 난간에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여덟 시가 넘어 해가 넘어갈 때쯤 사진을 보면, 나만 앉아 있던 게 아니다. 난간을 따라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 있다.

이 언덕의 용도가 그거였던 셈이다. 저녁에 올라와 앉아 있다 내려가는 자리. 나는 그걸 모르고 왔다가 우연히 맞게 썼다.

여행지에서 그 장소를 어떻게 쓰는지 알려면 현지 사람들이 뭘 하고 있는지 보는 게 제일 빠르다. 다들 앉아 있으면 앉으면 된다.

전망대에서 뭘 하느냐가 다르다

해가 진 뒤의 부다페스트 시내
해가 진 뒤 — 도시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겔레르트 언덕에 가려면 알아두면 좋은 건 몇 개뿐이다. 자유의 다리 건너 겔레르트 호텔 쪽에서 걸어 올라가면 되고, 길은 흙길이며, 정상까지 5분 안쪽이다. 입장료는 없다. 여름이면 해가 여덟 시 넘어 넘어가니 일곱 시 반쯤 올라가면 낮과 노을과 야경을 한자리에서 다 본다.

그리고 하나 더 권한다면, 올라갈 때 읽을 걸 챙겨 가는 것이다. 사진만 찍고 내려오면 5분이면 끝나는 곳이다. 나는 책 한 권 때문에 한 시간을 썼다.

다음 편은 부다페스트의 마지막 날이다. 호스텔 주방에서 삼겹살을 구웠는데, 재료의 절반이 내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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