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 부다페스트 6] 겔레르트 언덕에서 사진만 찍고 내려오지 않았다

부다페스트 여행기 · 6편
전망대에 올라가면 사진을 찍고
몇 분 서 있다가 내려온다.
그날은 가방에 원서를 넣어 가서
앉아서 읽었다.
겔레르트 언덕에서 내려다본 자유의 다리와 도나우강
겔레르트 언덕에서 본 자유의 다리 — 이 도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전망대에서 사람들이 하는 일은 대개 같다. 올라가서 사진을 찍고, 몇 분 서 있다가 내려온다.

이날 나는 좀 다르게 썼다. 가방에 원서 한 권을 넣어 올라가서, 앉아서 읽었다.

겔레르트 언덕, 걸어서 4분

겔레르트 언덕에서 내려다본 다뉴브강과 시내
언덕에서 보면 강이 통째로 보인다
언덕 아래 겔레르트 호텔 외관
언덕 아래 겔레르트 호텔 — 여기가 출발점이다

겔레르트 언덕(Gellért-hegy)은 부다 쪽 강변에 솟은 낮은 언덕이다.

자유의 다리 건너편, 겔레르트 호텔이 있는 자리에서 시작한다.

그날 동선은 이랬다.

호텔 앞이 19시 21분, 오르는 길이 19시 25분, 정상 전경이 19시 26분이다.

호텔에서 정상까지 5분이 안 걸렸다.

이름에 '언덕'이 붙은 게 정확하다.

이름에 '언덕'이 붙은 이유가 있다.

부다페스트 전경을 보는 곳으로 어부의 요새와 이 언덕이 늘 같이 꼽히는데, 접근성으로 보면 여기가 훨씬 가볍다.

*흙길로 이어지는 오르막이다*

겔레르트 언덕으로 올라가는 흙길
오르는 길 — 나무 사이로 난 흙길에 난간만 붙어 있다
겔레르트 언덕
Gellért-hegy / Gellért Hill
언덕과 전망대는 그대로다. 치타델라 건물 자체는 보수 공사를 오래 했다
가격
무료
주소
Budapest, Gellért-hegy, 1118 Hungary
부다 쪽 강변에서 걸어 올라간다. 꼭대기 치타델라에서 다뉴브강과 국회의사당이 한 프레임에 들어온다. 그늘이 거의 없어서 한여름 낮에는 물을 챙기는 게 좋다

올라가는 길은 정비된 관광 계단이 아니었다. 나무 사이로 난 흙길에 난간만 붙어 있는 형태다.

그래서 오르는 동안 도시가 안 보인다.

나무에 가려 있다가 정상에서 한꺼번에 열린다.

나는 이 순서가 마음에 들었다.

케이블카로 올라가면 도시가 서서히 넓어지는데, 걸어 올라가면 마지막 몇 걸음에서 통째로 나타난다.

자유의 여신상을 역광으로만 찍었다

⚱ 발 견
자유의 여신상
Szabadság-szobor
🧑‍🎨  키슈팔루디 스트로블 지그몬드
🗓  1947년
🪨  청동 (높이 14m · 받침 포함 40m)
📍  겔레르트 언덕 정상
📜  처음에는 소련군 해방 기념비로 세워졌고, 아래에 붉은군대 병사상이 함께 있었다
ℹ️  1989년 이후 병사상은 조각공원으로 옮겼고, 비문도 「헝가리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로 바뀌었다
역광으로 실루엣만 보이는 자유의 여신상
역광이라 실루엣만 남았다
역광 속 자유의 여신상 실루엣
자유의 여신상 — 역광으로 실루엣만 남았다

정상에는 자유의 여신상(Szabadság-szobor)이 서 있다.

종려나무 잎을 두 손으로 높이 든 여성상이고, 강 건너 페스트 쪽에서 올려다보면 이 언덕의 표식처럼 보인다.

사진을 세어보니 이 여신상을 여러 장 찍었는데 대부분이 역광 실루엣이다.

저녁 일곱 시 반, 해가 여신상 뒤로 넘어가는 시각이었다.

정면으로 제대로 찍은 건 한 장뿐이다.

그날 뭘 해보려던 건지는 지금 정확히 모른다

그날 뭘 해보려던 건지는 지금 정확히 모른다.

실루엣만 여러 번 찍힌 걸 보면 한 장으로 안 돼서 계속 다시 눌렀다.

조리개도 노출 보정도 모르던 시절이라 화면만 보면서 각도를 바꿔가며 눌렀다.

결과는 전부 검은 덩어리로 나왔다.

지금이면 노출을 인물에 맞춰 두 장, 실루엣으로 두 장 나눠 찍는다.

그런데 이 검은 사진들이 나쁘게 보이지 않는다.

역광에서 뭐가 안 되는지 모르는 채로 계속 눌러본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여기서 책을 읽었다

언덕 위에서 도시를 배경으로
언덕 위 — 이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

이 편의 중심이 여기다.

그날 가방에 영어 원서 한 권이 있었다.

`퍼시 잭슨과 번개도둑` 아니면 `왕좌의 게임` — 둘 중 하나였는데 어느 쪽이었는지는 지금도 헷갈린다.

배낭여행 중에 원서를 들고 다닌 건 영어를 좀 붙여보려는 생각이었다.

언덕에 올라 전경을 보고, 자리를 잡고 앉아서 그 책을 읽었다. 바람이 불었다.

이게 왜 오래 남았는지 생각해보면, 그 시간에 아무것도 소비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입장료를 내지 않았고 뭘 사 먹지도 않았고 다음 일정으로 이동하지도 않았다.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앉아 책을 읽은 것뿐이다.

여행 경비로 치면 0원짜리 시간인데, 지금까지 남았다.

배낭여행이 길어지면 하루하루가 이동과 입장으로 채워진다.

아침에 나가서 뭘 보고 뭘 먹고 어디로 넘어간다.

그 리듬 안에서는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이 낭비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90일을 돌고 나서 기억에 남은 장면 중 상당수가 그 낭비 쪽이었다.

다들 앉아 있었다

해질녘 언덕에 줄지어 앉은 사람들
해질녘 — 언덕 난간에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여덟 시가 넘어 해가 넘어갈 때쯤 사진을 보면, 나만 앉아 있던 게 아니다.

난간을 따라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 있다.

이 언덕의 용도가 그거였던 셈이다.

저녁에 올라와 앉아 있다 내려가는 자리. 나는 그걸 모르고 왔다가 우연히 맞게 썼다.

여행지에서 그 장소를 어떻게 쓰는지 알려면 현지 사람들이 뭘 하고 있는지 보는 게 제일 빠르다.

다들 앉아 있으면 앉으면 된다.

전망대에서 뭘 하느냐가 다르다

해가 진 뒤의 부다페스트 시내
해가 진 뒤 — 도시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겔레르트 언덕에 가려면 알아두면 좋은 건 몇 개뿐이다.

자유의 다리 건너 겔레르트 호텔 쪽에서 걸어 올라가면 되고, 길은 흙길이며, 정상까지 5분 안쪽이다.

입장료는 없다.

여름이면 해가 여덟 시 넘어 넘어가니 일곱 시 반쯤 올라가면 낮과 노을과 야경을 한자리에서 다 본다.

그리고 하나 더. 올라갈 때 읽을 걸 챙겨 가면 좋다.

사진만 찍고 내려오면 5분이면 끝나는 곳이다.

나는 책 한 권 때문에 한 시간을 썼다.

전망을 보러 오른 언덕

마지막 날 아침에는 호스텔 주방에서 삼겹살을 구웠다. 재료의 절반이 내 것이 아니었다.

부다페스트 · 8편 중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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