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페스트 마가렛섬 음악분수, 같은 분수를 네 번 찍었다

마가렛섬 음악분수 전경, 물줄기와 사람들
마가렛섬 음악분수 — 그날 계획에 없던 곳이다

그날 오후 계획은 중앙시장이었다. 시장에서 랑고스를 먹고 나온 게 계획의 끝이었고, 그 뒤는 정해둔 게 없었다.

그런데 11년 뒤에 사진 아카이브를 열어보니, 그날 내가 남긴 영상이 한 장소에서만 네 개였다. 시장도 아니고 동상도 아니었다. 강 사이에 있는 섬의 분수였다.

다리를 건너면서 시작된 오후

자유의 다리를 건너며 동행과 찍은 사진
자유의 다리 위 — 제주도에서 온 친구와

시장에서 나와 자유의 다리를 걸어서 건넜다. 전날 밤에 야경을 보러 건넌 그 다리다.

옆에 있는 건 전날 밤 숙소에서 알게 된 제주도에서 온 친구다. 호스텔 라운지에서 사람들이 다 같이 사진을 찍다가 친해졌고, 다음 날 낮에는 이렇게 같이 다니고 있었다. 배낭여행의 관계는 이렇게 하루 단위로 만들어진다.

이 친구와 다닌 하루를 지금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때의 자유를 실컷 썼다는 것이다. 어디를 가야 한다는 것도 없고 몇 시에 뭘 해야 한다는 것도 없었다. 그냥 다리에 앉아서 강을 보고, 걷다가 뭐가 나오면 들어갔다.

누군지 모르는 동상 앞에서 공을 찼다

푸스카시 동상 앞에서 공 차는 포즈
푸스카시 동상 앞 — 알고 간 게 아니라 재밌어 보여서 찍었다

걷다가 동상 앞에 멈췄다. 어른 하나와 아이들이 공을 차는 모양의 동상이었는데, 자세가 재밌어서 나도 똑같이 공 차는 포즈로 사진을 찍었다.

그때 나는 이게 누구 동상인지 몰랐다. 알고 찾아간 게 아니고, 지나가다 재밌어 보여서 찍은 것뿐이다.

나중에 알았는데 페렌츠 푸스카시(Ferenc Puskás)였다. 1950년대 헝가리 국가대표의 상징이자 레알 마드리드에서 뛴 축구 역사상 손꼽히는 공격수다. 헝가리 대표팀이 "매직 마자르"로 불리며 잉글랜드를 6대 3으로 이겼던 그 팀의 중심이 이 사람이다. FIFA가 매년 주는 최고의 골 상 이름이 푸스카시 상인 것도 여기서 나왔다.

이런 걸 몰랐던 게 아쉽지는 않다. 오히려 이 순서가 맞았던 것 같다. 알고 갔으면 경건하게 사진 한 장 찍고 지나갔을 텐데, 모르고 갔으니 공 차는 포즈로 놀았다. 여행지에서 아는 게 많으면 태도가 조심스러워진다.

같은 분수를 네 번 찍었다

동상을 지나 걷다가 마가렛섬(Margitsziget)으로 들어갔다. 도나우강 가운데에 길게 누운 섬이고, 다리에서 이어져 걸어서 들어갈 수 있다. 부다도 페스트도 아닌 강 위의 공원이다.

여기서 음악분수를 만났다. 기대한 게 아니라 걷다가 마주쳤다.

*마가렛섬 음악분수 — 물줄기가 음악에 맞춰 올라간다*

*같은 분수, 다른 각도 — 이날 저녁 여섯 시쯤이다*

이 글의 제목을 그대로 적은 이유가 있다. 나는 이 분수를 네 번 찍었다. 사진이 아니라 영상으로 네 번이다. 촬영 시각이 18시 01분, 02분, 03분, 04분이다. 4분 동안 카메라를 계속 들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영상 네 개라는 사실 자체가 증거다. 여행 중에 같은 대상을 4분 동안 계속 찍는 일은 흔하지 않다. 도시의 대표 명소도 아니고 예약해서 간 곳도 아닌데, 그날 가장 오래 카메라를 향한 곳이 여기였다.

물에 발을 담갔다

마가렛섬 분수 가까이에서
분수 바로 옆 — 여기서 물에 발을 담갔다

보기만 한 게 아니다. 물에 발을 담갔다.

7월의 유럽을 배낭 메고 걸어 다니면 발이 제일 먼저 망가진다. 로마에서 며칠을 걷고 온 상태였고, 그날도 시장부터 다리까지 계속 걸었다. 그러다 찬물에 발을 넣었다.

*물줄기를 가까이서*

*분수 주변에 사람들이 앉아 있던 저녁*

이게 왜 오래 남았는지, 증거가 하나 더 있다. 이 여행 17일 뒤, 프랑스 리옹에서 무더위에 시달릴 때 내가 떠올린 장면이 이 분수였다. 그때 기록에 그렇게 적혀 있다. 여행이 길어지면 도시가 뒤섞이는데, 더위에 지칠 때마다 꺼내 쓰는 장면이 따로 생긴다. 부다페스트에서 그 자리를 차지한 건 야경이 아니고 이 분수였다.

스케이트보드를 샀다가 남에게 줬다

문구점에서 산 작은 스케이트보드
근처 문구점에서 산 작은 스케이트보드

이날 좀 엉뚱한 걸 하나 샀다. 근처 문구점에서 작은 스케이트보드를 샀다.

이유는 단순했다. 걷는 게 힘들었고, 이걸 타면 좀 편할 것 같았다. 사서 실제로 타고 다녔다.

그런데 내가 생각한 물건이 아니었다. 페니보드처럼 실제로 이동에 쓸 수 있는 보드를 기대했는데, 그냥 장난감에 가까운 크기였다. 배낭에 달고 다니기에도 애매했다.

그래서 다른 꼬맹이에게 줬다.

배낭여행에서 물건을 사는 기준이 이때 하나 정해진 것 같다. 짐이 늘어나는 물건은 그 무게만큼 쓸모가 확실해야 한다. 애매하면 결국 버리거나 남에게 주게 되고, 그 사이에 며칠을 짊어지고 다닌다. 지금도 여행 갈 때 뭘 살까 망설이면 그 보드가 떠오른다.

BUDAPEST 글자 조형물 앞 벤치
BUDAPEST 조형물 — 벤치에 앉은 사람이 나다

공원에 커다랗게 `BUDAPEST` 글자를 세워둔 조형물이 있었다. 사진을 보면 그 앞 벤치에 사람이 앉아 있는데, 그게 나다.

도시 이름을 크게 세워둔 조형물은 어디에나 있고 대개 사람들이 그 앞에 서서 사진을 찍는다. 나는 그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구도를 잡은 것도 아니고 그냥 앉아서 쉬고 있었을 것이다.

국회의사당에 해가 걸렸을 때

도나우강 너머 국회의사당의 일몰
강 너머 국회의사당 — 이 하루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해가 기울 무렵 강변으로 나왔다. 강 건너에 국회의사당이 있었고, 그 위로 해가 넘어갔다.

이 순간이 이 하루의 정산이었다. 시장에서 랑고스를 먹고, 모르는 동상 앞에서 공을 차고, 섬에서 분수에 발을 담그고, 쓸모없는 보드를 사서 남에게 주고, 그 끝에 이 일몰을 봤다. 어느 항목도 계획에 없었다.

그날이 도시 평가를 바꿨다

해가 진 뒤의 세체니 다리
해가 진 뒤의 세체니 다리

이 여행이 끝나고 나는 도시 평가를 정리해뒀다. 거기서 관광하기 좋았던 도시 1위가 부다페스트였다.

지금 그 순위를 다시 보면, 이유가 대성당이나 박물관이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부다페스트에서 내가 제일 오래 카메라를 든 곳은 강 위 섬의 분수였고, 제일 오래 앉아 있던 곳은 강변이었다. 걷다가 앉을 자리가 계속 나오는 도시였다.

그래서 나는 명소 개수로 도시를 고르지 않게 됐다. 앉을 데가 많은 쪽이 나한테는 더 맞았다.

다음 편은 이 도시에서 같은 음식을 두 번 먹은 이야기다. 시장에서 짜게 먹은 그 빵을, 이틀 뒤에 완전히 다르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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