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 모스크바 5] 백화점 안에 수박으로 쌓은 분수가 있었다, 이즈마일로보 환불 소동

모스크바 여행기 · 5편
깎아서 샀는데
나오는 길에 더 싼 걸 봤다.
그래서 돌아가
환불해 달라고 우겼다.

기념품을 사야 했다. 여행이 사흘 남았고, 러시아가 마지막으로 뭔가 살 수 있는 나라였다.

목조 성처럼 지어 놓은 시장

지하철을 타고 시내 동쪽 끝까지 갔다. 이즈마일로보라는 곳이다.

역에서 나오자 색을 칠한 목조 아치가 서 있었다. 시장 입구인데 놀이공원 정문 같았다.

색색으로 칠한 목조 아치가 세워진 이즈마일로보 입구
«ВЕРНИСАЖ»라고 적힌 아치를 지난다

안으로 들어가니 붉은 벽돌 성벽이 나왔다. 그 안쪽에 목조 궁전이 층층이 지붕을 얹고 서 있었다.

붉은 벽돌과 흰 장식으로 지은 이즈마일로보 크렘린 정문
성처럼 생겼지만 유적은 아니다
이즈마일로보 시장
Измайловский кремль · Вернисаж в Измайлово
지금도 주말 벼룩시장으로 운영 중
영업
주말 09:00 - 17:00이 중심 · 일부 상가는 매일 연다
가격
기념품은 50루블부터 · 마트료시카는 크기와 그림에 따라 크게 갈린다
주소
모스크바 동쪽 · 지하철 파르티잔스카야역(Партизанская) 바로 앞
옛 러시아 건축을 본떠 20세기 말에 새로 지은 목조 단지다. 문 닫을 시각이 가까우면 흥정이 급해진다 — 옆 가게를 먼저 다 보고 사는 게 낫다
시장 안내도가 그려진 커다란 벽면 지도
규모가 이만큼 된다

옛 러시아 건축을 본떠 이십 세기 말에 새로 지은 곳이라고 한다.

시장을 위해 세운 무대인 셈이다.

지붕이 층층이 얹힌 화려한 목조 궁전
지붕을 층층이 얹어 놨다

그래도 규모가 커서 걸어 다니는 재미가 있었다.

비 온 뒤라 사람이 적었고, 문 닫을 시각이 가까워 상인들이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기념품이 빼곡히 쌓인 실내 가판
문 닫을 시각이라 정리 중이었다

1500에서 1200으로, 그리고 700을 봤다

목표는 마트료시카였다. 까면 계속 작은 인형이 나오는 그 목각 인형.

가판에 들어가 오단짜리를 골랐다. 주인이 1500을 불렀다.

몇 마디 주고받아 1200까지 내렸다. 거기서 하나를 더 얹어 두 개에 2000으로 정리했다.

기분 좋게 들고 나왔다. 그리고 몇 걸음 안 가서 옆 가게 진열대를 봤다.

더 예쁜 게 700이었다.

여기서 그냥 넘어갔으면 이 편은 없었다. 나는 되돌아갔다.

술 취한 상인에게 환불해 달라고 우겼다

환불해 달라고 했다. 주인은 술이 좀 들어간 상태였고, 안 된다며 박스를 집어 던졌다.

물러섰으면 됐는데 오기가 생겼다. 계속 환불해 달라고 우겼다.

주인이 태도를 바꿔 두 개를 1000에 주겠다고 했다. 그 말에도 안 넘어가고 계속 환불을 요구했다.

결국 보다 못한 옆 가게 아저씨가 대신 환불을 해 줬다. 그렇게 돈을 돌려받고 나왔다.

그날 같이 다니던 사람이 그 옆에서 거의 울상이 돼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제일 미안하다.

돈 몇천 원 문제였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는 그게 자존심 문제로 바뀌어 있었다.

낯선 나라 시장에서 술 취한 상인을 상대로, 말도 안 통하는 채 버텼다.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다시 광장으로

시장을 나와 지하철을 타고 다시 시내로 돌아왔다.

밤의 GUM은 전구로 외벽 전체를 밝혀 놓고 있었다. 전날 밤에도 봤는데 다시 봐도 눈이 갔다.

밤에 전구로 외벽을 밝힌 GUM 백화점
전구로 외벽을 통째로 밝힌다

들어가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더 먹었다. 어제 먹고 오늘 또 먹었으니 이 도시에서 두 번 먹은 셈이다.

콘에 담긴 GUM 아이스크림
굼 백화점 앞에서 파는 민트 콘

전날 못 봤던 게 하나 있었다. 백화점 안쪽에 수박을 산처럼 쌓아 만든 분수가 있었다.

장식인 줄 알았는데 뒤쪽에서 실제로 수박을 팔고 있었다.

여름 끝물에 러시아 마트와 시장에는 수박이 산처럼 쌓인다. 백화점이 그걸 분수 모양으로 올려놓은 것이었다.

물이 나오는 분수 자리에 수박을 채워 놓은 셈인데, 사진으로 봐도 뭘 하는 물건인지 한참 걸려 알았다.

수박이 가득 쌓인 분수 조형물
수박을 쌓아 분수를 만들어 놨다

삼층까지 다시 한 바퀴 돌았다. 살 것은 없었지만 건물이 볼 만해서 그냥 걸었다.

밤늦게까지 문을 연 기념품 가게 내부
이 시간까지 문을 연 가게도 있었다
조명이 켜진 밤의 GUM 백화점 내부 회랑
살 건 없어도 삼층까지 걷게 된다

밖으로 나오니 광장 앞에 축제 노점이 들어서 있었다. 도시 탄생 868주년 주간의 마지막 밤이었다.

9월 첫 주말 이틀 동안 500개 넘는 행사가 열렸고, 밤 10시 반에는 시내 공원 곳곳에서 불꽃이 올라갔다.

보라색 조명이 켜진 다리 야경
다리에 보라색 조명이 들어와 있었다

고기 굽는 냄새가 났고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이틀 내내 못 들어간 광장 안쪽은 이날도 못 들어갔다.

그날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서점이었다.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이라고 했다.

글자를 하나도 못 읽는 나라에서 서점에 들어가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살 책이 없으니 진열대만 따라 걸었다.

축제 노점에서 음식을 굽는 상인
고기 굽는 냄새가 여기서 났다
축제장에서 현지 사람들과 함께 찍은 사진
무뚝뚝하다는 말과 달랐다

말이 안 통하는데 사진을 찍자고 먼저 손짓해 온 사람들이었다.

영어가 한마디도 안 통했다. 그런데도 한참을 같이 서서 웃고, 손짓으로 어디서 왔냐를 주고받았다.

러시아 사람은 잘 안 웃는다는 말을 여행 내내 들었다.

이 밤에는 그 반대였고, 그게 이 도시의 마지막 장면으로 남았다.

시장에서 상인과 실랑이를 벌인 것도 같은 날이다.

나라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는 게 왜 안 되는지, 그날 하루에 다 들어 있었다.

축제 기간 광장에 늘어선 음식 노점
노점 조명이 자정 가까이까지 켜져 있었다

이즈마일로보 가는 법

지하철 파르티잔스카야(Партизанская)역에서 걸어간다. 역에서 나오면 목조 아치가 바로 보인다.

시내에서 삼십 분쯤 걸린다.

주말이 본장이다. 평일에는 문을 닫는 가판이 많고 주말에 벼룩시장까지 함께 선다.

기념품을 제대로 고르려면 주말 오전이 낫다.

문 닫는 시각이 이르다. 해가 지면 정리를 시작하는 가게가 많다.

늦은 오후에 도착하면 볼 시간이 부족하다.

성처럼 생긴 건물은 유적이 아니다. 이즈마일로보 크렘린은 옛 양식을 본떠 새로 지은 복합 시설이다.

그렇다고 볼 게 없는 것은 아니고, 목조 건축을 한자리에서 보기에는 좋다.

마트료시카 고르기

한 가게만 보고 사지 않는다. 같은 층 안에서도 값이 두 배씩 차이 난다. 나는 그걸 산 뒤에 알았다.

단 수와 그림이 값을 정한다. 오 단, 칠 단으로 갈수록 비싸고, 손으로 그린 것과 전사한 것이 다르다.

안쪽 인형까지 얼굴이 제대로 그려져 있는지 열어 본다.

흥정이 기본이다. 부르는 값에서 이삼십 퍼센트는 내려간다.

다만 값을 깎는 데 성공해도 옆 가게가 더 쌀 수 있다.

살 마음이 확실할 때만 흥정한다. 깎아 놓고 안 사면 분위기가 험해진다. 환불은 더 그렇다.

다녀와서

그날 산 마트료시카는 결국 집에 못 가져왔다.

대신 이야기 하나를 가져왔다. 낯선 나라 시장에서 환불해 달라고 끝까지 버틴 이야기.

돌아보면 잘한 일은 아니다. 몇천 원 때문에 같이 다니던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었고,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래도 이 여행에서 내가 제일 나답게 굴었던 순간을 꼽으라면 아마 이날이다. 좋은 뜻이든 나쁜 뜻이든.

파르티잔스카야역 바로 앞. 주말에 시장이 제일 크다.

모스크바 마지막 날은 크렘린이었다.

크렘린 안에 들어가 한 번도 쏜 적 없는 대포와 한 번도 울린 적 없는 종을 봤다.

모스크바 · 6편 중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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