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 모스크바 2] 붉은광장에 못 들어간 덕분에, 밤새 그 둘레를 걸었다
끝내 못 들어갔다.
밤새 빙빙 돌았다.
숙소에 짐을 풀고 저녁이 되어 다시 나왔다. 목적지는 하나, 붉은광장이었다.
광장 앞에서 표를 못 샀다
해가 남아 있을 때 나섰는데 도심을 걷다 보니 금세 어두워졌다.

도로가 이상하게 넓었다. 차선이 여섯 개씩 되고 건물은 죄다 육중한 석조라, 걷는 사람이 작아 보이는 도시였다.

광장 입구에 도착하니 사람이 가득했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막혀 있었다.

마침 도시 탄생 868주년 행사 기간이었다.
9월 첫 주말 이틀 동안 500개 넘는 행사가 열렸고, 시에서 1000만 명을 예상했다고 한다.
붉은광장 개막식이 정오, 시내 18개 공원에서 밤 10시 반에 불꽃이 올라가는 일정이었다.
광장 안쪽은 행사장으로 쓰여서 표를 산 사람만 들어갈 수 있었다.

입구 옆 매표소에 남은 표를 봤다. 값이 만만치 않았고, 그날 밤에 굳이 그 돈을 쓸 이유를 못 찾았다.
여기서 한국인 한 명을 만났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이유로 서 있었으니 말이 붙었고, 그날 하루를 같이 다니게 됐다.
담을 따라 한 바퀴
들어가지 못하니 방법은 하나였다. 담을 따라 도는 것.
성벽을 끼고 걸으니 안 보이던 게 계속 나왔다.
조명을 받은 오벨리스크가 있었고, 그 옆으로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고 있었다.

무명용사의 묘였다. 이름을 모르는 병사 하나를 모셔다 놓고 그 앞에 불을 계속 켜 둔 곳이다.
정각마다 근위병 교대식을 한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그날 밤에는 그냥 불만 보고 지나갔다.
통제선 너머로 첨탑 하나가 보였다. 꼭대기에 붉은 별이 달려 있었다.

원래는 쌍두 독수리가 있던 자리다. 소비에트 시절에 별로 바뀌었고 지금도 그대로다.
광장 북쪽 끝에는 붉은 벽돌 건물이 서 있었다. 국립역사박물관인데 밤에 조명을 받으니 성처럼 보였다.

그리고 남쪽으로 더 걸어가자 그게 나왔다. 양파 모양 돔이 색깔별로 얹힌 성당.
테트리스에 나오는 그 건물이다. 블록이 쌓이는 화면 뒤에 서 있던 성이 바로 여기다.
실물을 보자마자 그 배경음악이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뚜뚜 뚜루루 뚜뚜 뚜루루루.
테트리스를 만든 사람도 소련 사람이었다. 게임에 이 성당을 넣은 게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정면에서 찍고 싶었지만 그 자리가 통제 구역이었다. 결국 옆에서, 뒤에서, 길 건너에서 각도를 바꿔 가며 찍었다.

백화점 안이 거리처럼 생겼다
광장 동쪽 면을 통째로 차지한 건물이 GUM 백화점이다.
밤인데 불이 환하게 켜져 있어서 들어가 봤다. 안에 들어서고 나서 조금 웃었다.

백화점이라기보다 실내로 들여놓은 거리였다.
유리 지붕 아래로 삼층짜리 회랑이 이어졌다. 중간에 다리가 걸려 있고 바닥에는 분수가 있었다.

명품 매장이 줄지어 있어서 살 것은 없었다. 대신 삼층까지 다 걸어 올라가며 구경했다.
입구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이 유명하다고 해서 하나 먹었다.
입에 넣으면 무슨 맛이었는지 생각나기 전에 사라졌고, 그래서 또 먹었다.
축제 한복판에 왕좌가 놓여 있었다
광장 바깥은 축제장이었다. 노점이 늘어서고 꽃 장식이 세워져 있었다.
*제복을 입은 행렬이 광장 앞을 지나갔다*
걷다 보니 사람 키만 한 왕좌가 하나 놓여 있었다. 누구나 앉아서 사진을 찍으라고 둔 것이었다.
앉아서 한 장 찍었다. 러시아 사람들은 표정이 무뚝뚝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이런 자리에서는 다들 잘 웃었다.

맥도날드에 웨지감자와 새우튀김이 있었다
밤이 늦어 배가 고팠고, 눈에 들어온 게 맥도날드였다.
메뉴판을 보다가 멈췄다. 웨지감자와 새우튀김이 있었다.

한국 맥도날드에는 없는 것들이라 둘 다 시켰다.
감자는 껍질째 두툼하게 썰어 튀긴 것이었고 새우튀김은 생각보다 컸다.
나와서 조금 더 걸으니 조명을 받은 분수가 물을 뿜고 있었다.
밤 열한 시가 넘었는데 사람들이 그 앞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새벽에 청소차가 넓은 도로를 훑고 지나갔다. 아침에 보면 이 큰 거리에 쓰레기 하나 없다.
스물아홉이라고 했더니 다들 놀랐다
숙소로 돌아오니 저녁 파티가 벌어져 있었다.
오븐에 구운 닭과 파스타가 나왔다. 닭가슴살에 향신료와 토마토, 감자를 같이 넣고 구운 것이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이 대부분 이십 대였다. 내가 나이를 말하자 한 번 놀랐다.

그리고 게임 계정을 보여 주자 또 한 번 놀랐다. 그날 밤 그 방에서 제일 잘 통한 화제가 그거였다.
코스프레를 좋아한다는 이탈리아 친구와도 한참 이야기했다.
스무 개 나라를 넘게 돌고도, 이 도시에서는 처음 외국에 나온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붉은광장 통제와 관람
행사가 있으면 통째로 막힌다. 국경일 열병식, 도시 기념행사, 대형 콘서트가 열리면 광장 전체가 통제되고 표가 있어야 들어간다.
방문일에 행사가 있는지 먼저 보는 게 낫다.
밤이 오히려 낫다. 성 바실리 대성당과 국립역사박물관, 크렘린 성벽에 조명이 들어와서 낮보다 윤곽이 또렷하다.
사람도 낮보다 적다.
광장 안에 못 들어가도 볼 것은 남는다. 성벽을 끼고 도는 길, 알렉산드로프 정원, 꺼지지 않는 불꽃, GUM 정면이 전부 통제선 바깥이다.
성 바실리 대성당은 안에도 들어간다. 지금은 박물관이라 별도 입장권을 산다.
내부는 통로가 좁고 미로처럼 이어진다.
GUM 백화점
백화점보다 건물을 보러 간다. 십구 세기 말에 지은 아케이드형 건물이고, 유리 천장 아래로 삼층 회랑이 이어진다.
입장료가 없다. 광장 쪽 문으로 그냥 들어간다. 살 게 없어도 한 바퀴 도는 사람이 많다.
아이스크림이 명물이다. 입구 매대에서 컵이나 콘으로 판다.
값이 싸고 줄이 길지 않으면 하나쯤 먹어 볼 만하다.
밤에도 조명이 켜져 있다. 광장이 통제된 날에도 백화점 정면은 그대로 보인다.
다녀와서
들어가려던 곳에 못 들어간 날이었다.
그런데 그 덕분에 광장을 한 바퀴 돌았고, 담 바깥에서 보이는 것들을 다 봤다.
안에 들어갔으면 사진 몇 장 찍고 나왔다.
여행에서 계획대로 안 되는 날이 대체로 이렇다. 못 한 것 하나 때문에 안 하려던 걸 여럿 하게 된다.
이날 만난 한국인과는 다음 날도 같이 다녔다. 그것도 표를 못 산 덕분이었다.
둘째 날은 비가 왔다.
리넨 상점과 마트를 돌면서 루블이 떨어졌다는 걸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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