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 모스크바 3] 마트 한 칸이 통째로 도시락 라면이었다, 루블이 떨어진 날의 장보기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 기분 하나로 하루를 썼다.
모스크바 둘째 날 아침, 지갑 사정이 이상하게 넉넉했다.
아침부터 비가 왔다
창밖이 흐렸다. 나가 보니 비가 제법 내리고 있었다.
도로가 워낙 넓어서 지나가는 차가 물을 한 무더기씩 튀겼다. 인도 안쪽으로 붙어 걸었다.

우산을 쓰고 걷는데 도로가 워낙 넓어서, 지나가는 차가 물을 뿜으면 인도까지 튀었다.

멀리 스탈린 시대에 지은 고층 건물이 안개에 반쯤 잠겨 있었다. 뾰족한 첨탑이 붙은 그 특유의 모양이다.

그 무렵 우크라이나 사태로 서방의 경제 제재가 이어지면서 루블 가치가 크게 떨어져 있었다.
원화를 바꾸면 평소보다 훨씬 많은 루블이 나왔다.
돈을 번 것도 아닌데 부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 하나로 그날은 작정하고 지갑을 열었다.
리넨 상점에서 14만 원을 썼다
먼저 간 곳은 IzoLna라는 리넨 상점이었다.

벨라루스산 침구와 원단이 선반마다 그득했다. 평소라면 눈으로만 보고 지나쳤을 것들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가격표를 볼 때마다 마음이 편했다.
이날 여기서만 14만 원어치를 샀다.
여행 내내 배낭 무게를 신경 쓰며 다녔는데, 이날은 그것도 잠깐 잊었다. 어차피 사흘 뒤면 집이었다.
마트 한 칸이 도시락이었다
다음은 마트였다. 진열대를 따라 걷다가 한 칸 앞에서 멈췄다.
컵라면이 매대 한 칸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었다. 러시아어 이름을 소리 내 읽어 보니 영락없이 도시락이었다.


한국 기업 팔도가 러시아에 내놓은 브랜드이고, 이름 자체가 한국말 도시락에서 왔다.
러시아 마트에서 이게 주력 상품처럼 깔려 있는 광경이 신기해 한참 봤다.
옆 칸에는 짜장라면 같은 낯익은 한국 제품도 꽂혀 있었다. 케피르가 한 줄 가득한 유제품 매대도 지나쳤다.

계산대 옆에는 마샤와 곰 캐릭터 상품이 잔뜩 있었다.
러시아 애니메이션인데 이쪽에서는 아이 있는 집이면 다 아는 캐릭터다.
같이 다니던 사람이 이 만화를 좋아해서 한참 골랐다.

러시아 초콜릿과 과자를 손에 잡히는 대로 담았다. 영수증을 보니 이만큼 사고도 값이 몇천 원이었다.

소 울음소리에서 이름을 따온 식당
장을 보고 아르바트 거리로 갔다.
신 아르바트의 넓은 대로를 지나 좁은 구 아르바트 골목으로 들어서니 분위기가 바뀌었다.

점심은 골목 안 러시아 전통 음식점에서 먹었다. 간판에 МУ-МУ라고 붙어 있었다.

소가 우는 소리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했다. 우리말로 하면 음메 식당쯤 된다.
쟁반에 담아 고르는 방식이라 말이 안 통해도 됐다. 손으로 가리키면 담아 준다.
밥과 빵, 생선튀김, 샐러드를 담고 만두처럼 생긴 펠메니를 올렸다.
수프는 둘을 시켰다. 붉은 보르쉬와, 차갑게 먹는 오크로시카.

보르쉬는 사탕무로 만들어서 달짝지근했다. 러시아 음식이 짜기만 할 줄 알았는데 이건 달았다.
밥을 먹고 나와 카페에 들어가 잠깐 쉬었다.
러시아에서는 카페가 곧 밥집이라, 커피만 시키려다 메뉴판을 한참 봤다.
도시락 라면이 왜 거기 있나
한국 기업 팔도가 만든 러시아 국민 라면이다. 이름은 한국말 '도시락'에서 왔고, 현지 표기는 Доширак이다.
1990년대에 자리를 잡았다. 소련 해체 직후 물자가 부족하던 시기에 들어가 시장을 넓혔고, 지금은 러시아 컵라면 시장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사각 용기가 특징이다. 한국에서 파는 원형 용기와 달리 러시아용은 사각형이다.
기차 여행에서 먹기 좋은 모양이라 자리를 잡았다는 말이 있다.
맛 종류가 한국보다 많다. 현지 입맛에 맞춘 변형이 여럿이라 마트 한 칸이 전부 이 브랜드인 경우가 흔하다.
모스크바 여행 전 지금 확인할 것
이 여행을 할 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외교부는 러시아 전역에 특별여행주의보를 발령했다.
최근 확인 기준으로도 이 조치는 그대로다.
모스크바와 노보시비르스크는 전면 여행금지구역이 아니다.
다만 외교부는 긴급한 용무가 아니면 취소·연기를 권고한다.
최신 등급은 외교부 해외안전여행 러시아 페이지에서 확인한다.
카드 결제도 그때와 다르다.
서방 제재로 비자·마스터카드의 러시아 내 결제가 막혀서, 외국에서 발급한 카드는 현지에서 쓸 수 없다.
현금 환전과 현지 결제 수단을 미리 확인해야 한다.
다녀와서
환율 하나로 하루의 성격이 정해진 날이었다.
같은 물건을 봐도 값이 싸게 느껴지면 손이 나간다. 그날 산 것 중에 꼭 필요했던 건 별로 없다.
그런데 마트 한 칸을 채운 도시락 라면 앞에서 한참 서 있던 건 지금도 생각난다.
지구 반대편 마트에서 한국말 이름을 러시아 글자로 읽는 경험은 흔치 않다.
그날 오후에는 낙서로 뒤덮인 벽 하나를 봤다.
그리고 직원들이 춤추는 버거집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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