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 모스크바 4] 빅토르 최의 벽, 낙서가 30년 넘게 덮이는 자리
낙서로 덮여 있었다.
버거집 직원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구 아르바트 골목을 계속 걸었다. 오후 내내 이 거리에 있었다.
스타벅스에서 텀블러를 다섯 개 샀다
거리를 걷다 스타벅스가 보였다. 간판이 키릴 문자로 적혀 있어서 한 번에 못 알아봤다.

들어가서 커피를 시키려다 굿즈 진열대 앞에서 멈췄다. 마트료시카 무늬를 넣은 텀블러가 있었다.
도시마다 다른 디자인을 내놓는 물건인데, 러시아 것은 그 무늬가 확실했다. 결국 다섯 개를 집었다.
루블이 떨어져 있던 때라 계산할 때 손이 덜 떨렸다. 그날 산 것 중 지금까지 제일 잘 쓴 물건이기도 하다.
거리에는 축제 부스가 계속 서 있었다. 도시 탄생 기념 주간이라 아르바트 쪽도 사람이 많았다.

낙서가 삼십 년째 덧붙는 벽
골목 하나를 꺾어 들어가니 벽 전체가 낙서였다.

일부러 만든 거리 예술이 아니었다. 이름 하나가 계속 반복해서 적혀 있었다.
빅토르 초이. 러시아 록밴드 키노(Кино)의 리더였고, 1990년 8월 라트비아 리가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스물여덟이었다.
고려인 3세다. 소련 말기 젊은 세대의 목소리로 불렸다.
죽은 지 30년이 넘었는데 러시아에서는 아직 그 이름이 살아 있다.
그가 죽은 뒤 이 벽에 팬들이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노랫말, 이름, 짧은 문장이 층층이 덧붙었다.
지워도 다시 쓰이고, 덧칠해도 그 위에 또 쓰인다고 했다. 벽에 페인트가 몇 겹으로 앉아 있는 게 눈으로 보였다.
키릴 문자를 못 읽으니 내용은 몰랐다. 그런데 이름 석 자가 몇 백 번 반복되는 벽은 읽지 않아도 뜻이 전해졌다.
사람들이 벽 앞에 서서 한참을 들여다봤다. 사진을 찍고 가는 사람보다 그냥 서 있는 사람이 많았다.

골목을 빠져나오는데 비보이 팀이 거리 공연을 하고 있었다.
러시아 사람들은 표정이 무뚝뚝하다는 말을 계속 들었는데, 여기서는 다들 손뼉을 쳤다.
직원들이 시간마다 나와서 춤을 췄다
저녁 먹기엔 이른 시각인데 수제버거집에 들어갔다. 간판에 BEER와 HAMBURGER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안은 미국식 다이너처럼 꾸며져 있었다. 빨간 가죽 부스, 체크무늬 바닥, 벽에 붙은 옛날 포스터.
주문을 하고 앉아 있는데 음악이 커졌다. 그러더니 직원들이 홀 한복판으로 나왔다.

원색 의상을 걸치고 깃털 장식을 든 채 춤을 췄다. 정해진 시각마다 전 직원이 나와서 하는 공연이었다.
*음악이 나오자 홀 한가운데가 무대가 됐다*

*폼폼을 들고 나온 쪽은 이 직원이었다*
손님들은 익숙한 듯 박수를 쳤다. 나만 포크를 든 채로 구경했다.
버거는 배부른 상태로 먹어도 들어갔다
점심을 먹은 지 두 시간밖에 안 됐는데 버거가 나왔다.
패티가 두툼했고 어니언링이 같이 담겨 나왔다. 배가 부른 상태였는데도 다 먹었다.


살이 찌는 게 느껴지는 기분이 있는데, 그날이 딱 그랬다. 그런데 기분은 좋았다.
여행 막바지라 몸이 축나 있었다. 이럴 때는 잘 먹는 게 회복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빅토르 초이의 벽
구 아르바트 골목 안에 있다. 큰길에서는 안 보이고 골목으로 한 번 꺾어 들어가야 나온다.
지하철 아르바트스카야역이나 스몰렌스카야역에서 걸어간다.
빅토르 초이는 러시아 록의 상징이다. 밴드 키노의 리더였고 1990년에 스물여덟 나이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소비에트 말기 청년 세대에게 남긴 영향이 커서 지금도 추모가 이어진다.
입장료도 관리인도 없다. 그냥 벽이다. 낙서를 지우면 며칠 안에 다시 채워진다.
페인트가 여러 겹으로 앉아 있다. 오래 덧붙은 흔적이 표면에 그대로 남아서, 벽면 자체가 두꺼워져 있다.
아르바트 거리에서 뭘 보나
신 아르바트와 구 아르바트가 다르다. 신 아르바트는 소비에트 시절 재개발로 뚫린 넓은 대로이고, 구 아르바트는 옛 건물이 남은 보행자 전용 거리다.
구 아르바트가 걷기 좋다. 차가 안 들어오고 거리 예술가와 기념품 가판, 카페가 이어진다.
끝에서 끝까지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이 안 걸린다.
식당은 골목 안쪽이 낫다. 대로변은 관광지 가격이고, 한 블록 안으로 들어가면 현지 식당이 나온다.
축제 기간에는 부스가 선다. 도시 기념일이나 명절에는 거리 전체에 노점이 들어서서 평소와 다른 풍경이 된다.
다녀와서
그날 오후에 본 것 중 제일 오래 기억에 남은 게 벽 하나였다.
관광지도 아니고 안내판도 없었다. 이름 하나가 몇 백 번 적혀 있는 벽이었을 뿐이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시작된 낙서가 3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그 도시가 무엇을 기억하는지 보여 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골목만 빠져나오면 직원들이 춤추는 버거집이 있었다.
같은 거리 안에서 이렇게 온도가 다른 것도 이 도시다웠다.
그날 저녁에는 전통시장에 갔다.
마트료시카를 샀다가 환불하겠다고 우기는 일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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