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 이스탄불 5] 아무 계획 없던 하루, 호스텔 구석에서 내 노후를 봤다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보였다.
이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정했다.
도시 하나를 도는 일정을 짜지 않았고, 몇 시에 어디를 가겠다는 계획도 없었다.
조식으로 시작했다

호스텔 값에 아침이 포함돼 있었다. 접시에 삶은 달걀과 토마토, 오이, 올리브가 담겨 나왔다.
치즈가 같이 나오는데 이게 보들보들했다. 터키식이라고 했고 짜지 않았다.
테라스에서 먹었다. 앞에 앉은 사람과 한국말로 얘기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두 달 넘게 영어로만 말하다가 한국말을 쓰니 힘이 덜 들었다. 그날 기록에 한국어를 많이 썼다고 적어놨다.
대학교 앞 주스가 육백 원이었다
오전에 이스탄불 대학교 쪽으로 걸었다. 목적은 하나였다. 대학가면 먹을 게 싸다는 것.
가서 보니 맞았다. 길가 노점에 오렌지가 무더기로 쌓여 있고 착즙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간판에 값이 붙어 있었다. 수제 유기농 레모네이드 1.5리라, 물 0.75리라.

그때 계산으로 1리라가 400원쯤이었다. 주스가 육백 원, 물이 삼백 원이다.
시내에서 같은 걸 사면 3리라를 넘었다. 대학가라 반값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한 블록 더 가니 1리라에 파는 데가 있었다. 육백 원이 제일 싼 줄 알았는데 사백 원이 나왔다.
이런 걸 알아내는 데 하루가 든다. 그리고 그날은 하루를 쓸 여유가 있었다.
공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주스를 들고 공원으로 갔다. 나무가 줄지어 심긴 길이 이어져 있었다.
앉아 있다가 걷고 또 앉았다. 사진을 몇 장 찍었는데 다 나무와 길이다.
그날 지나간 건물 중에 안이 텅 빈 곳이 하나 있었다. 긴 테이블만 줄지어 놓여 있고 사람이 없었다.

무슨 용도인지 묻지 않았다. 그날은 그런 걸 확인하지 않고 그냥 봤다.
호스텔 아저씨는 예약 사이트를 하나씩 눌렀다
숙박을 하루 연장하려고 카운터에 갔다. 아저씨가 알겠다고 하고 컴퓨터를 켰다.
그런데 하는 일이 예상과 달랐다. 예약 사이트를 하나씩 열어서 방이 찼다고 눌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부킹닷컴, 호스텔월드, 아고다, 익스피디아. 네 군데를 일일이 들어가 체크한다고 했다.
한 군데에서 방을 팔면 나머지에서도 막아야 하는데 그게 자동으로 안 되는 상태였다.
옆에서 보다가 이걸 자동으로 만들면 되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그때 기록에 그 충동을 적어놨다.
물론 아무것도 만들지 않았다. 여행 중이었고 그날은 쉬는 날이었다.

떠나는 날 아침에 이 앞에서 사진을 한 장 찍었는데, 나는 활짝 웃고 있고 아저씨는 늘 그렇듯 입을 다물고 있다.
그 덤덤한 게 좋았다.
구석에서 노트북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로비 구석에 어르신 한 분이 앉아 있었다. 차를 마시면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며칠을 같은 자리에서 봤다. 관광하러 나가는 것 같지도 않았고 누구와 크게 말하지도 않았다.
이름이 조라고 했다. 그날 뒹굴다가 말을 걸었다.
그때 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소개했다.
그러자 그분이 자기도 그렇다고 했다. 수학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했다.
오래된 노트북에 리눅스 마크가 있었다
보여주고 싶다고 하셔서 옆에 앉았다.

노트북이 꽤 오래된 것이었다. 에이서 아스파이어, 은색 테두리가 벗겨져 있었다.
화면이 켜지자 리눅스 마크가 보였다. 그 나이대에서 흔히 보는 화면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코드를 컴파일해 돌렸다. 직접 만든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큰 정수를 다루는 프로그램이었다.
천 자리까지 되는 정수를 파일에서 읽어다가 더하고 나누고 곱하는데, 원주율 옵션이 따로 다섯 가지쯤 붙어 있었다.
보르바인 알고리즘도 있고 라마누잔 공식도 있었다.
하나를 돌려봤다.
화면에 원주율 자릿수가 줄줄이 찍혔다.
화려한 건 아니었다. 검은 터미널에 흰 글씨뿐이다. 그런데 그날 본 것 중에 제일 인상적이었다.
그때 기록에 그것을 보물 같았다고 적어놨다.
화면 오른쪽 아래 시계는 뉴욕 시간에 맞춰져 있었다. 어디서 왔는지는 끝까지 묻지 않았다.
그가 기뻐한 건 얘기할 상대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설명하는 동안 표정이 계속 밝았다. 프로그램 얘기를 알아듣는 사람이 나타난 게 반가운 듯했다.
호스텔에는 여행자가 계속 들어오고 나간다. 그중에 그 얘기를 받아줄 사람은 며칠에 한 명쯤이었을 테다.
나는 다른 데서 놀랐다. 그 나이에 컴퓨터를 그렇게 다룬다는 게 신기했다.
미래에서 온 나 아닐까
그 자리에서 엉뚱한 상상을 했다.
이름도 비슷했다. 하는 일도 비슷하고 이스탄불 호스텔 구석에 앉아 있다.
미래에서 온 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때 기록에 이렇게 적어뒀다. 나중에 이스탄불 테라스에 앉아 프로그램을 만들며 노후를 보내는 겁니까, 하고.
한참 지나 그 문장을 다시 읽었다. 그때는 농담으로 썼는데 지금은 나쁘지 않은 그림으로 보인다.
여행에서 만난 사람 중에 밥을 사준 사람도 있고 재워준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분이 준 것은 다른 종류였다.
저녁은 늦게 나왔다

해가 지고 같은 방을 쓰는 한국 친구와 밥을 먹으러 나갔다. 그 친구의 인도네시아 친구도 같이 갔다.
주문한 음식이 늦게 나왔다. 한 시간쯤 기다렸다.
덕분에 얘기를 많이 했다. 늦게 나온 게 그날은 손해가 아니었다.
인도네시아 친구에게 한국말 한 단어를 가르쳤다. 아주 예쁘다는 뜻으로 쓰는 줄임말이었다.
기억하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나온 음식은 수프와 빵, 그리고 피자였다. 이 여행에서 제일 많이 먹은 음식이 피자였는데 여기서도 그걸 시켰다.

밥을 먹고 나와 광장을 걸었다. 모스크에 조명이 들어와 있었다.

낮에 봤을 때와 다른 건물처럼 보였다. 낮에는 회색 돌이었는데 밤에는 주황색이었다.
이런 하루를 만들려면
장기 여행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날을 하루 넣는 게 결과적으로 이득이었다. 그날 이후 체력이 붙었다.
- 숙소 연장 — 하루 더 묶고 싶으면 카운터에서 직접 말하는 편이 빠르다. 예약 사이트 재고를 손으로 맞추는 곳이 있다
- 대학가 — 이스탄불 대학교 주변은 시내보다 먹을 게 싸다. 노점 주스가 시내 절반 값이었다
- 물값 — 노점에서 생수가 주스의 반값이다. 더운 날에는 물을 먼저 산다
- 야경 — 술탄아흐메트 광장은 밤에 조명이 들어온다. 낮에 본 사람도 밤에 한 번 더 갈 만하다
하루는 통째로 아무것도 안 했다
이 도시에서 사흘을 보냈고, 그중 하루는 통째로 아무것도 안 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 하루가 이스탄불에서 제일 남았다.
블루모스크도 시장도 갔지만 기억에 남은 건 로비 구석의 노트북이다.
계획을 세우면 그 계획에 없는 것은 못 만난다. 그날은 계획이 없었고 그래서 만났다.
짐을 싸서 나왔고, 그날부터 이 여행에서 가장 무모한 이동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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