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 카디프 3] 없는 사람 앞에 꽃이 놓여 있었다
적혀 있었다.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적혀 있었다.

성과 경기장을 보고 나서 물가로 내려갔다. 카디프 베이다.
도심에서 물가로 내려왔다

광장 바닥에서 물줄기가 솟고 있었다. 분수라기보다 바닥에 구멍을 뚫어놓은 것이고, 아이들이 그 사이를 뛰어다녔다.
여기는 원래 석탄 항구였다. 웨일즈 탄광에서 캔 석탄이 이 부두에서 배에 실렸고, 한때는 세계에서 석탄이 가장 많이 나가는 항구였다.
탄광이 문을 닫으면서 부두도 죽었다. 지금 보이는 건 그 자리를 통째로 갈아엎어 다시 만들었다.

산책로에 흰 조각상이 서 있었다. 사람 키의 몇 배쯤 되는 인물상인데 표면이 거칠게 깎여 있었다.
붉은 시계탑이 서 있었다

물가에 붉은 벽돌 건물이 하나 서 있었다. 이 만에서 제일 눈에 띄는 건물이고 어느 각도에서 찍어도 이게 들어온다.
석탄 항구 시절 항만 회사 건물이었다. 주변이 다 헐리고 새로 지어졌는데 이것만 남았다. 옛날 사진에서 이 시계탑이 보이면 그게 이 항구다.
노르웨이 교회가 있었다

조금 걸으니 흰 목조 교회가 나왔다. 주변이 다 벽돌과 돌인데 이 건물만 나무라 혼자 튄다.
노르웨이 선원들을 위해 지은 교회다. 석탄을 실으러 온 배에 노르웨이 선원이 많았고, 그 사람들이 예배 보고 편지 부치고 모이는 자리가 필요했다.
배가 안 오게 되면서 교회도 쓸모가 없어졌다. 헐릴 뻔한 걸 옮겨 세워서 지금은 전시장과 카페로 쓴다.
한 도시의 항구가 어떻게 돌아갔는지가 이 건물 하나에 들어 있다. 웨일즈 석탄과 노르웨이 배가 여기서 만났다.
표지판이 두 언어였다

방향 표지판에 화살표가 여러 개 붙어 있는데 전부 두 줄이었다. 위가 영어고 아래가 웨일즈어다.
웨일즈어는 영어와 계통이 다르다. 철자를 봐도 발음이 짐작이 안 된다. 자음이 몰려 있고 `w`와 `y`가 모음 자리에 온다.
이 나라에서 웨일즈어는 법으로 영어와 동등하다. 그래서 공공 표지판은 반드시 두 언어를 같이 쓴다. 스완지 펍에서 럭비 깃발을 보고 생각한 것이 여기서 글자로 다시 나왔다.
벽 하나가 통째로 편지였다
산책로를 걷다가 이상한 벽을 봤다.
낡은 나무 판벽에 사진과 카드와 편지가 빽빽하게 붙어 있었다. 꽃다발도 여러 개 매달려 있고 어떤 건 비닐에 싸여 있었다. 오래돼서 색이 바랜 것 위에 새것이 겹쳐 붙어 있었다.
무슨 사고 현장인 줄 알았다.
명판에 생몰년이 적혀 있었다

벽 가운데에 검은 금속 명판이 붙어 있었다. 제대로 만든 것이었다. 이름이 크게 새겨져 있고 그 아래 생몰년이 있었다.
이안토 존스, 1983–2009.
그 아래 한 줄이 더 있었다. 이 행성의 아이들을 지키다 목숨을 잃었다고. 그리고 이 부두 상가의 관리진이 경의를 표한다고 적혀 있었다.
전사자 추모비의 문법 그대로다. 이름, 연도, 죽은 이유, 그리고 헌사.
그런데 명판 맨 아래에 아주 작은 글씨로 주석이 하나 더 달려 있었다.
*이안토 존스는 BBC 드라마의 가상 인물이며, 이 드라마의 일부가 이 부두에서 촬영됐다. 그는 2009년에 방영된 미니시리즈에서 외계 종족과의 대치 중 사망했다. 이것은 사랑받은 캐릭터를 기리는 즉흥 추모비다.*
명판이 자기 입으로 이 사람은 존재한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 드라마는 카디프를 무대로 한다. 이 도시 지하에 외계인을 상대하는 기관이 있다는 설정이고, 그 입구가 바로 이 부두다. 실제로 여기서 촬영했다.
2009년에 그 인물이 극중에서 죽었다. 그러자 팬들이 이 자리에 꽃을 놓기 시작했다. 한 번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안 끝났다.
상가 측에서 치우지 않았다. 오히려 정식 명판을 달아줬다. 그리고 그 아래 팬들이 붙인 작은 판이 하나 더 있는데, 이 성지를 지켜줘서 고맙다고 상가 관리진에게 쓴 감사패였다.

추모 벽은 산책로 한쪽 끝에 있다. 지나가다 보면 그냥 낡은 나무 벽이라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다.
없는 사람 앞에 진짜 꽃이 놓여 있다. 상가는 그걸 치우지 않았고, 누군가는 거기에 감사패까지 붙였다. 이 세 겹이 다 진짜인데 가운데 있는 사람만 없다.
칩스에 식초를 뿌린다

배가 고파서 식당가로 들어갔다. 물가 건물 안에 식당이 여러 개 붙어 있었다.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모네이는 밀크셰이크를 시키고 스튜어트는 맥주를 시켰다.

감자튀김이 두툼했다. 우리가 아는 가늘고 바삭한 것과 다르다. 손가락만 하게 굵게 썰어서 겉만 익히고 속은 감자 그대로다. 여기서는 이걸 칩스라고 부른다.

옆에 놓인 병이 식초였다. 여기서는 감자튀김에 식초를 뿌린다.
맥아로 만든 갈색 식초인데 이 나라에서는 감자튀김에 이걸 뿌리는 게 기본이다. 처음 뿌려보면 시큼한 냄새가 확 올라와서 당황한다. 그런데 몇 개 먹다 보면 기름진 게 정리된다.
한국에서 튀김에 간장을 찍는 것과 비슷한 자리다. 그 나라에서 오래 굳은 조합이라 설명이 안 되고 그냥 그렇게 먹는다.
조각상마다 사진을 찍었다

이 만에는 조각이 많다. 그리고 우리는 지나가는 조각마다 사진을 찍었다.
청동 조각상에는 아이가 다리를 걸고 매달려 있었다. 여기선 우리보다 애가 먼저였다.

배 모양 조각이 하나 놓여 있었다. 뒤집힌 선체처럼 생겼는데 옆으로 돌아가서 보면 사람 얼굴이다.
바다에서 죽은 상선 선원들을 기린다. 두 차례 전쟁에서 이 항구를 드나들던 배들이 격침됐고, 그 사람들 이름이 여기 남았다.
앞에서 본 추모 벽과 이걸 같은 날 봤다. 하나는 실제로 죽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고 하나는 존재한 적 없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둘 다 이 물가에 있다.

아이들이 청동 동물 위에 올라타 있었다. 나도 반대쪽에 걸터앉았다. 조각인지 놀이기구인지 구분하지 않고 그냥 탔다.
의회 건물 지붕이 나무였다

물가에 낮고 넓은 건물이 하나 있었다. 지붕이 나무이고 물결처럼 굽어 있다.
웨일즈 의회 건물이다. 웨일즈는 영국 안에 있지만 자기 의회가 따로 있고 여기서 자기들 법을 만든다.
건물이 낮다. 위압감을 주는 쪽과는 반대로 갔다. 유리를 많이 써서 밖에서 안이 들여다보이고 지붕만 크게 얹었다.

그 옆이 공연장이다. 구릿빛 외벽에 글자가 크게 뚫려 있는데 그것도 두 언어다. 웨일즈어 한 줄, 영어 한 줄.
의회와 공연장과 옛 항만 건물이 물가에 나란히 서 있다. 석탄을 실어 나르던 부두가 지금은 이렇게 쓰인다.
그날 축제가 열려 있었다

산책로를 따라 노점과 놀이기구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여름이라 뭔가 행사가 열린 모양이었다.

회전 그네가 돌고 있었다. 의자가 사슬에 매달려 하늘로 올라갔다.
성벽 안쪽에도 천막이 서 있었고 여기도 축제였다. 이 도시는 그날 여름 한복판이었다.
해가 물에 떨어졌다

해가 내려가면서 물에 길게 반사됐다. 정박한 배들이 그 앞에서 검게 보였다.
전날 저녁에도 강가에서 해 지는 걸 봤다. 이틀 연속이었다.
카디프 베이
시내에서 버스나 기차로 십 분 남짓이다. 걸어가면 삼십 분쯤 걸린다.
물가를 따라 산책로가 이어져서 한 바퀴 도는 데 두 시간이면 넉넉하다. 해 질 무렵이 제일 좋다.
노르웨이 교회
건물 자체가 작아서 십 분이면 다 본다. 물가 끝쪽에 있으니 산책 코스에 자연히 들어간다.
이안토 존스 추모 벽
머메이드 키 산책로 끝, 나무 판벽 쪽에 있다. 표지가 크지 않아서 모르고 지나가기 쉽다.
드라마를 안 봤어도 볼 만하다. 명판에 적힌 주석까지 읽어야 이 자리가 무슨 자리인지 완성된다.
물가에서 본 추모비 두 개
그날 이 물가에서 추모비를 두 개 봤다.
하나는 전쟁에서 죽은 선원들을 위한 것이다. 실제로 배가 가라앉았고 사람이 죽었다.
다른 하나는 드라마 속 인물을 위한 것이다. 그 사람은 태어난 적이 없다.
그런데 두 번째 앞에 놓인 꽃이 더 많았다. 편지도 더 많았고 계속 새로 붙고 있었다.
무엇을 기리는지보다 기리는 행위 자체가 사람에게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대상이 실제로 있었는지는 그다음 문제인 모양이다.
명판을 만든 쪽도 그걸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가상 인물이라고 아래에 적어놓고도, 위쪽은 진짜 추모비처럼 만들어 붙였다.
돌아가서 셋이 밥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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