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 카디프 4] 그 집 주방에서 내가 한 건 양파 써는 것뿐이었다

카디프 여행기 · 4편
며칠 동안
얻어먹기만 했다.
그날 내가 한 건
양파 써는 것뿐이었다.
주방에서 두 사람이 각자 접시를 들고 웃으며 서 있다
각자 접시를 들고 한 장.

카디프에서 하루를 다 쓰고 스완지로 돌아왔다. 카디프 편 마지막이다.

돌아오는 길

물가 공사장 흙더미 너머로 아파트와 하늘이 보인다
돌아가는 길. 한쪽은 아직 공사판이었다.

베이에서 해가 지는 걸 보고 차로 돌아갔다.

차 안에서 본 앞유리 너머 고속도로
한 시간쯤 달렸다. 해안을 따라 곧게 간다.

한 시간쯤 달렸다. 스완지와 카디프는 그 정도 거리다. 웨일즈 남쪽 해안을 따라 고속도로가 나 있어서 곧게 간다.

차 안에서 다들 조용했다. 아침에 나와서 종일 걸었으니 그럴 만했다.

돌아가서 뭘 먹을지 이야기가 나왔다. 밖에서 사 먹지 말고 집에서 하자는 쪽으로 정해졌다.

주방에 셋이 섰다

좁은 주방 조리대 앞에 한 사람이 서 있다
장 봐온 걸 조리대에 늘어놨다.

집에 도착해서 장 봐온 걸 조리대에 늘어놨다.

이 집 주방은 좁다. 조리대가 한쪽 벽을 따라 길게 나 있고 그 아래에 세탁기가 들어가 있다. 성인 셋이 서면 서로 비켜줘야 지나간다.

그런데 셋이 다 들어갔다.

양파를 썰었다

도마 위에서 칼로 양파를 썰고 있다
내가 맡은 건 양파였다.

내가 맡은 건 양파였다.

칼을 잡고 썰기 시작하니 스튜어트가 옆에 서서 봤다. 뭐라고 한마디씩 하는데 절반은 못 알아들었다. 아마 그렇게 잘게 썰 필요 없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요리를 자주 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양파 써는 건 할 줄 알았고, 그게 그날 주방에서 내가 확실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도마 앞에서 양파를 썰고 있고 옆에서 다른 사람이 당근을 들고 지켜본다
스튜어트가 옆에서 봤다. 그렇게 잘게 썰 필요 없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다 썰고 나니 한 무더기였다. 눈이 매워서 중간에 몇 번 멈췄다.

봉지 앞면에 장 볼 목록이 있었다

손에 든 소스 봉지 앞면에 요리 사진과 장 볼 목록이 인쇄되어 있다
Colman's BEEF STROGANOFF. 봉지 앞면에 장 볼 목록이 인쇄돼 있다.
콜먼스 양념 봉지
Colman's Seasoning Mix
지금도 마트 필수 품목이다. 종류가 수십 가지다
가격
봉지 하나에 1파운드 안팎
주소
영국 마트 어디서나 · 소스·양념 코너
노리치에서 시작한 영국 조미료 브랜드. 봉지 앞면에 4인분 기준 장 볼 목록이 인쇄돼 있어 그대로 사면 된다

장 봐온 것 중에 양념 봉지가 하나 있었다. 비프 스트로가노프용 가루인데, 우유를 붓고 끓이면 소스가 되는 물건이다.

이 봉지를 한참 봤다. 앞면 아래쪽에 장 볼 목록이 인쇄돼 있었다.

4인분 — 소고기 등심 450그램(가늘게 썰어서), 양파 한 개, 버섯 115그램, 빨간 파프리카 한 개, 저지방 우유 300밀리리터

봉지 하나가 레시피이자 쇼핑 리스트다. 마트에서 이걸 집어 들고 목록대로 담으면 저녁 한 끼가 나온다. 뭘 살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봉지 하나가 레시피이자 쇼핑 리스트다. 마트에서 이걸 집어 들고 목록대로 담으면 저녁 한 끼가 나온다. 뭘 살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 나라 마트에 이런 봉지가 한 통로를 채우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앞 편에서 즉석식품 칸이 크다고 썼는데, 이건 그것보다 한 칸 위다. 완제품은 아니고 요리는 직접 하되 어려운 부분만 봉지가 맡는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나온 건 이게 아니었다. 봉지는 사 왔고 사진까지 찍었는데, 정작 상에 오른 건 다른 것이었다.

냄비가 두 개 올라갔다

냄비에 감자와 당근이 담겨 있고 옆 도마에 썬 양파가 놓여 있다
감자와 당근을 큼직하게 썰어 넣었다.

한쪽 냄비에는 감자와 당근을 넣었다. 껍질을 벗기고 큼직하게 썰어서 물에 넣고 삶았다.

냄비 안에서 감자와 당근이 물에 잠겨 끓고 있다
볶거나 굽지 않고 물에 삶는다.

감자와 당근을 통째로 넣고 삶았다. 볶거나 굽지 않고 물에 삶는다. 영국 가정식에서 채소는 대개 이렇게 나온다.

주방에 서서 웃고 있는 사람
모네이가 주방을 지켰다.

주방을 맡은 건 모네이였다. 내가 양파를 썰고 스튜어트가 옆에서 참견하는 동안 실제로 요리를 진행한 건 그였다.

가스레인지 앞에서 냄비를 저으며 요리하고 있다
냄비를 젓는 건 모네이가 했다.

불 앞은 계속 그가 봤다. 큰 냄비에 뼈 붙은 고기를 넣고 갈색 육수에 오래 졸였다.

양고기였다. 갈비 쪽을 토막 낸 것을 이 나라에서는 램촵이라고 부른다. 한 조각씩 뼈가 붙어 있어서 접시에 놓으면 모양이 난다.

좁은 주방에 둘이 붙어 섰다

좁은 주방에서 두 사람이 각자 냄비를 보고 있다
한 사람은 고기를, 한 사람은 채소를.

나중에는 둘이 나란히 서서 각자 냄비를 봤다. 한 사람은 고기를, 한 사람은 채소를.

냄비에서 당근이 끓고 있고 옆 팬은 뚜껑이 덮여 있다
브로콜리는 마지막에 넣었다.

브로콜리는 마지막에 넣었다. 오래 삶으면 색이 죽어서 잠깐만 데친다.

접시에 담았다

접시에 갈색 소스를 끼얹은 고기와 당근과 브로콜리가 담겨 있다
스트로가노프에 삶은 감자와 당근, 브로콜리를 곁들였다.

접시 가운데에 고기를 놓고 갈색 소스를 끼얹었다. 옆에 당근과 브로콜리를 둘렀다.

영국 가정식 접시는 대개 이 구성이다. 가운데 고기, 옆에 삶은 채소, 그 위에 소스. 밥이나 면 대신 감자가 탄수화물 자리를 차지한다.

포크를 든 손 아래로 소스에 잠긴 고기와 채소가 보인다
그레이비를 끼얹었다.

소스가 접시 바닥에 고였다. 고기를 졸인 국물을 그대로 끼얹은 갈색 그레이비다. 짭짤하고 매운 게 하나도 없었다.

영국 밥상에서 그레이비는 거의 필수다. 고기를 구운 팬에 남은 육즙에 밀가루와 육수를 풀어 만든다. 삶기만 한 채소가 심심한 걸 이게 받쳐준다.

며칠 동안 이 집에서 먹은 것들이 떠올랐다. 아침에 나온 계란과 토스트, 드라이브스루 햄버거, 펍에서 먹은 감자칩, 밤에 사 온 차우멘. 그리고 내가 끓인 컵라면.

그중에 이게 제일 제대로 된 한 끼였다. 그리고 이 집 주방에서 만들어진 유일한 끼니였다.

각자 접시를 들고 찍었다

접시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모네이가 자기 접시를 들고, 나도 내 접시를 들었다.

두 사람이 접시를 들고 손가락으로 표시를 하며 웃고 있다
다 담고 한 장 더.

사진을 한 장 더 찍었다. 다들 손가락으로 뭔가 표시를 하고 있다.

밥 사진은 많이 찍었는데 밥 만든 사진은 이날이 처음이다. 여행하면서 남의 나라 음식을 계속 먹었지만 남의 나라 주방에 서본 건 몇 번 없다.

정확히 말하면 만든 건 내가 아니다. 나는 양파를 썰었고 스튜어트는 옆에서 참견했고, 요리는 모네이가 했다. 그래도 그 좁은 주방에 셋이 다 들어가 있었다.

콜먼스 시즈닝 믹스

영국 마트에서 이 코너를 한 번 보면 이 나라 가정식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이 온다. 셰퍼드 파이, 칠리 콘 카르네, 비프 스트로가노프처럼 집에서 자주 하는 요리가 봉지 단위로 나와 있다.

여행자에게도 쓸모가 있다. 숙소에 주방이 있으면 봉지 하나와 목록에 적힌 재료만 사서 한 끼를 만들 수 있다. 외식비가 비싼 나라라 차이가 크다.

그날의 마지막 장면은 저녁상

카디프에 다녀온 날 저녁상이 그날의 마지막 장면이다.

며칠 동안 이 집에서 잤고, 이 집 차를 탔고, 이 집에서 밥을 먹었다. 처음 만난 날 버스표 한 장을 잃어버린 게 시작이었는데 그게 며칠째 이어지고 있었다.

받는 게 길어지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값을 치르겠다고 하면 안 받고, 그렇다고 계속 받기만 하면 관계가 한쪽으로 기운다.

그날 저녁은 그게 잠깐 평평해진 시간이었다. 양파를 썬 게 대단한 기여는 아니지만, 주방에 같이 서 있었다는 게 그날의 요점이다.

접시를 들고 찍은 사진에서 다들 웃고 있다. 만든 사람이 셋이고 먹는 사람도 셋인 저녁이었다.

칠십 대 두 분과 하루를 다닌 이야기다.

카디프 · 4편 중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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