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 취리히 3] 유럽 사람들처럼 낮잠을 자보고 싶었다

낮잠을 잔다고 들었다.
풀밭을 찾아 올라갔다.
시내를 다 보고 오후 한 시가 지났다. 그리고 방향을 도시 바깥으로 틀었다.
도심을 벗어났다

구시가를 지나 북서쪽으로 걸으니 건물이 금방 성글어졌다. 넓은 도로에 차가 몇 대 안 지나갔다.
나무 그늘로 들어갔다

조금 더 가니 나무가 덮인 길이 나왔다. 벤치가 놓여 있고 사람이 거의 없었다.
여기서 자기로 했다

이 언덕에 올라온 이유가 이거였다.
유럽에서는 날 좋으면 공원 잔디에 그냥 드러누워 자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다.
여행 내내 실제로 그런 사람들을 봤다.
광장에서도 자고 강가에서도 자고, 아무도 그걸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한번 해보고 싶었다.

배낭을 베고 누웠다. 그리고 진짜로 잤다.
누워서 위를 봤다

자다 깨서 눈을 떴는데 나뭇가지가 위를 다 덮고 있었다.
나무가 너무 예뻤다. 그래서 누운 채로 카메라를 들어 위를 찍었다.
이날 사진 중에 제일 마음에 남은 게 이거다.
앉아서 보는 나무랑 누워서 보는 나무가 다르다는 걸 그때 알았다.
여기가 트레일 시작점이었다

일어나서 조금 걸으니 안내판이 서 있었다.
헬사나 트레일(Helsana Trail) 시작점이라고 적혀 있었다.
지도에 코스가 색깔별로 그려져 있고 거리가 나와 있다 — 3.0km, 5.4km, 5.1km, 14.0km. 달리기나 걷기용으로 만든 순환 코스다.
옆에는 사슴 그림이 그려진 야생동물 주의 표지가 붙어 있었다.
*개는 목줄을 매고, 운동하는 사람은 길에서 벗어나지 말 것.*
그때는 이게 뭔지 모르고 그냥 길을 따라갔다.
표지판을 다시 보고 나서야 내가 걷던 게 정식으로 만들어진 코스였다는 걸 알았다.
밭이 이어졌다

숲을 빠져나오니 울타리가 나오고 그 너머로 초지가 펼쳐졌다.

자갈길이 밭 사이로 곧게 뻗어 있었다. 여기부터는 도시 흔적이 거의 없다.

세계에서 물가가 제일 비싸다는 도시에서 전차로 얼마 안 되는 거리인데, 여기는 그냥 농지다.
*외곽 방목장*
가게에 들어갔다

한참 걷다가 가게를 만났다. 물이 떨어져서 들어갔다.
음료 진열대가 벽 하나를 다 채우고 있었다.
김밥 한 통이 6.50이었다

간편식 코너에 김밥 종류가 놓여 있었다. 가격표를 봤다.
6.50 / 6.50 / 6.70 프랑.
그때 환율로 한 통에 8천 원 가까이 된다.
같은 시기 한국 편의점 삼각김밥이 700원쯤 하던 때다.
열 개를 살 돈이었다.

계산대에서 20프랑을 꺼냈다.
이 지폐를 물병 위에 얹어놓고 사진을 찍었는데, 환전한 돈이 얼마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
이 한 장으로 며칠을 버텨야 하는 상황에서 한 끼에 6.50이 나간다.

뚜껑을 열었다. 연어가 들어간 김밥이었는지 샌드위치식 김밥이었는지 지금은 헷갈린다.
검은깨가 뿌려져 있었던 건 사진에 남아 있다.
먹으면서 너무 힘들다고 생각했다. 맛이 아니라 값 때문이었다.
소가 나왔다

길을 따라 더 가니 풀밭에 소가 있었다. 울타리 안에서 풀을 뜯고 있었고, 바로 뒤에 큰 건물이 서 있었다.
건물과 소가 한 프레임에 들어오는 게 이상했는데, 여기서는 그게 보통인 모양이었다.
*소떼가 길로 걸어나온다 — 취리히 외곽*
계속 걸었다

이날 사진에 배낭이 자주 나온다. 걸으면서 그냥 아래를 찍은 것들이다.

갈대가 둘러싼 연못도 지났다.
돌아오는 길

언덕 위에서 마을이 내려다보였다. 지붕이 낮게 깔려 있고 그 뒤로 다시 언덕이다.

큰 나무 아래에서 한 번 더 쉬었다.
정확히 어느 마을을 지났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표지판을 안 찍었고 지도도 안 봤다. 그냥 길을 따라갔다.
*길 한가운데로 소가 내려왔다*
*도시에서 걸어 나오면 이런 데가 나온다*
취리히 근교 트레일 걷기
헬사나 트레일은 스위스 여러 도시에 깔린 무료 순환 코스다.
취리히에서는 횡거베르크(Hönggerberg) 쪽에 시작점이 있고,
안내판에 코스별 거리가 3km부터 14km까지 표시돼 있다.
등록이나 요금이 없고 표지를 따라가면 된다.
돈 안 쓰는 하루를 만들기에 이만한 게 없다. 취리히 시내에서 트램으로 나와 걷기 시작하면 반나절이 채워진다.
물만 챙기면 되는데, 중간에 가게가 드물어서 출발 전에 사 두는 편이 낫다
근교 상점 물가도 시내와 다르지 않다.
여름 낮에는 그늘이 갈린다. 숲 구간은 시원하지만 농지 구간은 완전히 트여 있어 해를 그대로 받는다.
모자와 물은 필수다.
잔디에 누워 낮잠을 잤다
이날 오후에 쓴 돈은 6.50프랑이 전부였다.
낮잠은 성공했다. 유럽 사람들이 잔디에 눕는 걸 보면서 부러워했는데, 직접 해보니 별거 아니면서도 좋았다.
눈 뜨자마자 보이는 게 나뭇잎이었다.
이 도시의 마지막 밤을 어디서 보냈는지, 그리고 2박 3일을 7만 원으로 통과한 계산이 다음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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