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 노보시비르스크 2] 8도 시베리아 새벽을 반바지에 슬리퍼로, 스톱오버 하루
반바지에 슬리퍼였다.
시베리아에 하루가 생겼다.
새 표를 끊고 나니 하루가 통째로 비었다. 공항에 앉아 있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엔 아까웠다.
표는 손으로 쓴 종이였다. 시각과 좌석을 볼펜으로 적어 준다.


정류장에 시간표가 붙어 있었다. 톰스크와 케메로보, 크라스노야르스크가 적힌 노선도다.
전부 시베리아 안의 다른 도시들이다. 가장 가까운 케메로보가 서울에서 부산 정도 거리다.
이 정류장에서 버스로 갈 수 있는 범위가 그렇다는 뜻이었다. 땅이 넓다는 걸 시간표로 먼저 봤다.

버스 창밖으로 강이 지나갔다. 해가 막 올라오는 참이었다.

영상 8도의 시베리아, 나만 반바지였다
공항 문을 나서자 공기가 달랐다. 전광판에 영상 8도가 떠 있었다.

그리스에서 반바지에 슬리퍼로 다니다가 그대로 넘어왔다.
배낭 안에 긴바지가 있었지만 짐 맨 아래에 깔려 있었다.
위에 있는 걸 다 꺼내 걸쳤다. 반팔 위에 후드집업, 그 위에 바람막이까지 세 겹이었다.
모자를 쓰고 목까지 감싸고 나니 위쪽은 완전무장이었다. 그런데 아래는 반바지에 슬리퍼 그대로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미 재킷을 입고 있었다. 발이 제일 시렸다.
하늘이 이제 막 밝아지고 있었다. 시베리아에서 해 뜨는 걸 볼 줄은 몰랐다.

111번 버스가 내려 준 곳
시내로 가는 방법을 물어보니 111번 버스를 타라고 했다.

영어가 통하지 않았다. 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했는데 알아들었는지 확신이 안 섰다.
가는 내내 창밖을 보며 여기가 맞나 생각했다. 러시아어 표지판만 지나갔다.
버스가 내려 준 곳은 기차역 앞이었다. 광장이 넓고 청사가 컸다.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지나는 역이다. 여기서 기차를 타면 모스크바까지 사흘이 걸린다.
나중에 알았는데 이 역이 시베리아 횡단철도에서 가장 큰 역이다. 러시아 전체로도 모스크바 카잔역 다음이다.
새벽이라 광장이 비어 있어서 그렇게 큰 줄 몰랐다. 다음 날 낮에 다시 지나가고서야 규모가 보였다.
노보시비르스크 지하철은 토큰으로 탄다
지하철을 타려고 개찰구에 갔다가 잠깐 멈췄다.
교통카드도 종이표도 없었다. 창구에서 파는 건 토큰이었다.
동전처럼 생긴 걸 사서 개찰구에 넣는 방식이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참 봤다.

모스크바에서는 종이 카드였는데 여기는 토큰이다. 같은 나라 안에서도 도시마다 방식이 달랐다.
역 안은 벽면이 부조로 장식돼 있었다. 모스크바 지하철만큼 화려하진 않아도 공들인 티가 났다.

노보시비르스크 지하철은 노선이 두 개뿐이다. 러시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인데 규모는 소박했다.
대신 오비 강을 건너는 다리가 하나 있다.
길이 2,145미터로, 지붕 덮인 지하철 교량 중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길다.
노선은 둘뿐인데 세계 기록이 하나 끼어 있다. 이 도시가 대체로 그런 식이었다.
벽에 노선도가 붙어 있었다. 두 개 노선이 강을 건너 십자로 만난다.

가방에 남아 있던 초르니 흘렙
이동하는 동안 배가 고팠다. 가방에 남아 있던 검은 빵을 꺼냈다.
러시아에서 흔히 파는 호밀빵인데 시큼한 맛이 난다. 처음 먹었을 때는 상한 줄 알았다.

며칠 지나니 이 맛에 익숙해졌다. 지하철 안에서 뜯어 먹으며 창밖을 봤다.
비행기를 놓쳐서 하는 여행이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는 이미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알렉산더 네브스키 성당
시내를 걷다 붉은 벽돌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알렉산더 네브스키 성당이다.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 건물 축에 든다.
입구를 못 찾고 건물을 빙 돌았다. 서성이는 걸 본 아주머니가 반대쪽이라고 손짓해 줬다.

말이 안 통해도 뜻은 전해졌다. 러시아 사람들은 무뚝뚝하다는 말을 계속 들었는데, 이런 순간이 더 많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벽과 천장이 성화로 덮여 있었다. 촛불이 여러 개 켜져 있고 미사가 진행 중이었다.

여기는 촬영을 막지 않았다. 크렘린 성당에서는 못 찍었던 내부를 여기서 봤다.
정교회 미사는 앉는 자리가 없다. 사람들이 선 채로 미사를 보고 중간중간 절을 했다.
*낮게 이어지는 성가가 이 영상에 들어 있다*
성호를 긋는 방향이 가톨릭과 반대였다. 노래하는 사람들 목소리가 낮고 길게 이어졌다.
바깥이 추웠고 미사가 경건해서 꽤 오래 서 있었다.
몇 시간 전에 게이트 앞에서 발을 구르던 사람이라고는 안 믿길 만큼 마음이 가라앉았다.
톨마체보에서 시내 가는 법
공항버스와 시내버스가 있다. 톨마체보 공항에서 시내까지 삼십 분 안팎이고, 111번 같은 시내버스가 기차역 방면으로 간다.
영어가 거의 안 통한다. 모스크바와 다르다. 나는 목적지 이름을 키릴 문자로 적어서 보여 줬다.
지하철은 토큰제다. 창구에서 토큰을 사서 개찰구에 넣는다. 노선이 두 개뿐이라 길 잃을 일은 적다.
환승 대기가 길면 시내에 나갔다 올 만하다. 공항과 시내가 가깝고 볼 것이 한나절 분량은 된다.
다만 짐 보관 위치를 먼저 확인한다.
네브스키 성당 방문 전에 알아 둘 것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 건축 중 하나다. 19세기 말에 세워졌고,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다.
입구는 건물 뒤쪽이다. 정면으로 가면 못 들어가서 처음 가면 헤맨다.
내부 촬영이 허용된다. 러시아 정교회 성당은 촬영 금지인 곳이 많은데 여기는 열려 있었다.
다만 미사 중에는 조용히 움직인다.
미사는 서서 본다. 정교회에는 신도석이 없다. 관람이 목적이어도 뒤쪽에 서서 보게 된다.
다녀와서
비행기를 놓치지 않았으면 이 도시를 평생 몰랐다.
시베리아에 인구 100만이 넘는 도시가 있는 줄도 몰랐다.
지하철을 토큰으로 타고, 정교회 미사를 선 채로 본다는 것도 여기서 처음 알았다.
여행 마지막에 도시가 하나 추가되었다. 값은 40만 원이었지만 돈과 별개로 교훈을 얻었다.
시간대를 확인하는 습관이 그날 이후로 생겼고, 계획이 무너져도 하루는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날 오후에는 오페라 극장과 레닌 동상을 보러 갔다.
그리고 공항으로 돌아가 열두 시간을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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