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 노보시비르스크 3] 공항에서 열두 시간, 옆자리 사람들이 여행이 됐다
시베리아 한복판에 있었다.
계획에 없던 도시를 걸었다.
성당을 나와 시내를 더 걸었다. 비행기 시각까지는 아직 한참이 남아 있었다.
아침에 지날 때는 회색 덩어리였던 거리가 낮에는 그냥 도시로 보였다.

극장 근처에 작은 예배당이 하나 서 있었다. 금색 돔이 흐린 하늘에서도 눈에 띄었다.

1편에서 지나친 그 예배당이다. 같은 자리에 한 번 헐렸다가 다시 선 건물이다.
광장 건너편은 그냥 큰 교차로였다. 전차선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시베리아의 구월은 회색이 아니었다
아침에 지나갈 때는 멈춰 있던 분수가 물을 뿜고 있었다.

시간이 정해져 있는 모양이었다. 같은 자리를 몇 시간 만에 다시 지나가면서 그걸 알았다.
주변에 꽃밭이 둥글게 조성돼 있었다.
시베리아라고 해서 눈밭만 있는 줄 알았는데 구월 초의 이 도시는 여느 유럽 도시와 비슷했다.

노보시비르스크 오페라 극장, 볼쇼이보다 넓다
걷다 보니 거대한 돔 지붕이 나왔다.

노보시비르스크 오페라 발레 극장이다. 러시아에서 가장 큰 극장 건물이고, 볼쇼이보다도 넓다.
전날 모스크바에서 볼쇼이 극장을 보고 왔는데, 크기만 놓고 보면 이쪽이 위다. 그런데 아는 사람이 훨씬 적다.
앞에 커다란 동상들이 서 있었다. 공연을 볼 시간은 없어서 바깥만 돌았다.
걷다가 청록색으로 칠한 커다란 건물을 만났다. 회색 하늘 아래에서 그 색만 튀었다.

새벽에 버스에서 내렸던 그 역이다. 낮에 보니 아치 모양이 기차 앞모습을 닮아 있었다.
레닌 광장, 동상이 아직 그대로다
극장 앞이 레닌 광장이다. 이름 그대로 레닌 동상이 서 있다.

소비에트가 무너진 뒤 많은 도시에서 이 동상이 치워졌다. 여기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동상 양옆으로 병사와 노동자 상이 함께 서 있었다. 한 세트로 만든 구성이다.
왼쪽은 총을 든 병사, 오른쪽은 망치를 든 노동자와 곡식을 든 농민이다.
혁명을 이끈 사람과 그 뒤를 받친 사람을 한 화면에 세워 놓은 셈이다.
레닌 본인은 이 도시에 산 적이 없다. 그래도 광장 이름이 레닌이고 한가운데 서 있는 건 그다.
시베리아 도시들이 소비에트 시절에 크게 자랐기 때문이다. 노보시비르스크도 그때 인구가 몇 배로 늘었다.
앞에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이 여행에서 사회주의 시절 조형물을 이렇게 가까이 본 건 이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광장 옆으로는 붉은 천막을 친 노점이 줄지어 있었다. 천막은 다 닫혀 있었고 사람도 없었다.
9월 초 러시아 도시에는 가을 농산물 장이 자주 선다. 여는 시간이 아직 아니었던 것 같다.
몇 시간 뒤에 다시 지나갈 때도 그대로였다. 무슨 장이었는지는 끝내 못 봤다.

블린과 이상한 요거트
시장 근처에서 먹을 것을 샀다.
하나는 블린이었다. 봉지째 들고 걸으면서 먹었다.

맛있었다. 러시아에 와서 먹은 것 중 제일 입에 맞았다.
다른 하나는 블루베리를 넣은 요거트였다. 러시아 사람들이 자주 먹는다고 해서 골랐다.
한 모금 먹고 눈이 커졌다. 단맛을 기대했는데 신맛이 먼저 왔다.
이쪽 요거트는 원래 이 맛이라고 한다. 결국 다 못 먹었지만 러시아 사람들이 뭘 먹고 사는지는 확실히 알았다.
톨마체보 공항에서 보낸 열두 시간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돌아왔다. 창밖으로 회색 하늘이 계속 지나갔다.

비행기까지 열두 시간이 남아 있었다. 의자를 하나 잡고 앉았다.

공항 밤샘은 이 여행에서 이미 여러 번 했다. 이번에는 낮부터 시작이라는 게 달랐다.
옆자리에 러시아 아주머니와 어린 아이가 앉았다.

아이가 카메라를 보더니 자기가 찍겠다고 손을 내밀었다.

돌려받은 사진에 아이 얼굴이 화면 가득 들어와 있었다.
뒤쪽에 앉은 분은 한국어를 했다. 키르기스스탄 사람인데 한국에 십 년을 살았다고 했다.
지구 반대편 시베리아 공항에서 한국어가 들리니 잠깐 어리둥절했다. 그분과 한참 이야기했다.
맞은편 아저씨는 베이징에 사는 분이었다. 내가 그날 밤 베이징으로 간다고 하니 자금성 위치를 알려 줬다.
북경오리를 꼭 먹어 보라는 말도 했다. 다음 편에서 결국 못 먹지만, 그때는 그럴 줄 몰랐다.
열두 시간이 그렇게 갔다.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 있었는데 지루하지 않았다.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볼 것
오페라 발레 극장이 중심이다. 러시아에서 가장 큰 극장 건물이고, 그 앞 레닌 광장이 도시의 중앙이다.
레닌 동상이 그대로 있다. 소비에트 시절 조형물을 볼 수 있는 곳이라 그 자체가 볼거리다.
알렉산더 네브스키 성당까지 걸어간다. 광장에서 멀지 않고, 볼 만한 곳이 대체로 걸어서 닿는다.
반나절이면 한 바퀴다. 환승 대기가 여섯 시간 이상이면 시내를 보고 오는 게 가능하다.
공항 장시간 대기 요령
짐 보관 위치를 먼저 확인한다. 톨마체보는 짐 보관소 운영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이른 새벽에는 창구가 안 열려 있을 수 있다.
콘센트 자리를 먼저 잡는다. 열 시간이 넘어가면 충전이 문제가 된다. 벽 쪽 좌석을 우선한다.
먹을 것을 시내에서 사 온다. 공항 안은 선택지가 적고 값이 비싸다.
주변 사람과 말을 튼다. 열두 시간을 혼자 앉아 있는 것과 옆자리와 이야기하며 보내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그날 내가 그랬다.
다녀와서
계획에 없던 하루였고, 그 하루의 절반을 공항 의자에서 보냈다.
그런데 돌아보면 그 열두 시간이 이 도시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다.
오페라 극장도 레닌 동상도 아니고, 옆자리 사람들이다.
한국어를 하는 키르기스스탄 아저씨와 베이징 사는 아저씨와 셀카를 찍겠다고 조르던 아이가 한 줄로 앉아 있었다.
비행기를 안 놓쳤으면 못 만났을 사람들이다.
비행기를 놓치고 40만 원을 다시 냈다. 그 돈으로 이 하루를 산 셈이 됐다.
그날 밤 비행기는 베이징으로 갔다.
자금성까지 야무지게 다녀왔다.
이제 여행이 슬슬 마무리되어간다. 다음은 중국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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