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 아테네 4] 아테네 고대 아고라, 돌덩이 사이에 신전 하나만 멀쩡히 서 있었다
봐야 하는 유적지였다.
신전 하나만 멀쩡히 서 있었다.
아테네에서 보낸 마지막 날이다. 이드라섬에 다녀온 다음 날이었고, 밤 비행기로 러시아에 가기로 돼 있었다.
마지막 날 아침이 라면이었다
배낭을 정리하려고 가방을 열었더니 한국에서 가져온 컵라면 뚜껑이 뜯겨 있었다.

며칠을 눌린 채 다녔으니 어딘가에서 터진 모양이었다. 국물을 부어 먹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 날 아침이 라면이 됐다. 옆에는 숙소에서 늘 나오던 빵과 잼 접시가 같이 놓였다.

짐을 싸는 동안 개가 계속 발치에 와 있었다. 오늘 나간다는 걸 아는 것처럼 굴었다.

사진을 못 찍은 성당
숙소를 나와 걷다가 돌로 쌓은 작은 성당을 만났다.

그리스는 인구의 95%가 정교회를 믿는 나라다. 도심 골목마다 이런 성당이 하나씩 박혀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벽과 천장이 온통 금빛이었다. 그런데 내부는 촬영을 허락하지 않았다.
제일 화려한 걸 사진으로 못 남기고 나왔다. 그날 본 것 중에 기억에만 있는 건 이것뿐이다.
아고라는 상상력으로 채워야 했다
걸어서 고대 아고라로 갔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모여 회의하고 장사하고 떠들던 자리다.
들어가서 처음 든 생각은 솔직히 이거였다. 그냥 돌덩이들이다.
기둥은 밑동만 남았고 건물은 바닥 윤곽만 남았다. 어디가 무슨 건물이었는지는 안내판을 읽어야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머릿속에 건물을 올려 보면서 걸었다. 이 자리에 기둥이 서고 저 자리에 지붕이 얹혔겠구나 하는 식으로.
한쪽에 복원된 스토아 건물이 길게 서 있었다. 여기만 지붕과 기둥이 온전해서 나머지를 상상하는 기준이 됐다.

스토아 안쪽 벽을 따라 목이 없는 조각상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유리 진열장에는 그나마 형체가 남은 인물상이 들어 있었다.
머리와 팔이 사라지고 갑옷 부분만 남은 토르소도 있었다. 없어진 데가 많을수록 오히려 오래 들여다보게 됐다.

철학자들이 여기로 매일 출근하다시피 걸어와서 나는 무엇인가를 따졌겠구나 싶었다.
지금은 그 자리에 잔디와 돌이 있다.
그 한복판에 신전 하나만 멀쩡했다
그러다 나무 사이로 건물 하나가 보였다.

기둥이 다 서 있고 지붕까지 얹혀 있었다. 아고라에서 유일하게 상상력을 안 써도 되는 건물이었다.
헤파이스토스 신전이다. 대장장이 신의 신전이고, 그리스에 남은 신전 중에서도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축에 든다.

같은 자리, 같은 시대인데 옆은 밑동만 남고 이건 지붕까지 남았다.
뭐가 남고 뭐가 사라지는지는 만든 사람 뜻대로 되는 게 아니다.
정면으로 올라가 한참 봤다. 파르테논은 언덕 위에서 늘 공사 중이었는데 이건 그냥 조용히 서 있었다.

언덕에 올라가니 아테네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낮은 건물들이 빽빽하고 그 위에 아크로폴리스가 얹혀 있었다.

색이 남은 조각 하나
아고라를 나와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으로 갔다.
박물관 바닥은 유리로 돼 있어서 아래에 발굴 현장이 그대로 보인다.
아테네 지하철 공사가 유독 오래 걸린 이유를 여기서 알겠다 싶었다.
건물을 세우려고 땅을 파면 유적이 나온다. 그러면 공사가 멈춘다.
전시실에서 걸음이 멈춘 건 파르테논 지붕 꼭대기에 얹혀 있던 장식이었다.
잎사귀가 소용돌이치듯 말려 올라간 모양인데, 일부에만 색이 남아 있었다.
기원전 447년에서 432년 사이에 만들어졌다.

이천 년이 훨씬 넘게 지나서도 그 색이 어디에 칠해져 있었는지가 남았다.
부서진 조각들을 어떻게 저 형태로 맞췄을까 하는 게 더 궁금했다. 조각 맞추기를 이천 년 뒤에 하는 셈이다.
유리창 너머로는 언덕 위 파르테논이 그대로 보였다. 실물을 옆에 두고 그 조각을 전시한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는 레고로 만든 아크로폴리스가 있었다. 붉은 망토를 두른 인형들이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아테네에 있는 동안 내내 역사와 신화만 봐서 머리가 지끈거렸는데, 여기서 좀 풀렸다.
마지막 끼니도 그거였다
박물관을 나와 또 그걸 먹었다. 아테네에서 네 번쯤 먹은 조합이다.
값이 제일 쌌고 입에도 맞았으니 마지막 끼니로도 이걸 골랐다.

그러고는 공항으로 갔다. 비행기가 아침이라 터미널에서 밤을 새워야 했다.
밤이 깊을수록 공항 조명이 파랗게 보였다. 앞자리 중국인 친구는 진작 잠들어 있었다.

나는 이 유로짜리 컵 샐러드를 늦은 저녁으로 먹었다. 이 여행에서 공항 밤샘은 이미 익숙한 일이 돼 있었다.

고대 아고라 관람
단독 입장권은 10유로다. 아크로폴리스를 포함한 일곱 개 유적을 묶은 통합권이 30유로이니, 두 곳 이상 볼 계획이면 통합권 쪽이 유리하다.
헤파이스토스 신전이 이 안에 있다. 아고라 입장권으로 그대로 들어간다.
아고라에서 유일하게 원형이 남은 건물이라 여기부터 보는 사람도 많다.
안내판을 읽으며 걷는 곳이다. 대부분 기초와 밑동만 남아서 아무 설명 없이 걸으면 잔디밭을 도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늘이 거의 없다. 한여름 정오에 들어가면 유적보다 더위가 먼저 기억에 남는다.
오전 이른 시각이나 늦은 오후가 낫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아크로폴리스 유적지 표와 별개다. 언덕 입장권을 끊었다고 박물관에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다.
둘 다 볼 계획이면 표를 두 장 준비한다.
촬영 규정이 층마다 다르다. 지금은 대부분의 전시실에서 플래시 없이 손에 든 카메라로 찍을 수 있지만, 아르카익 갤러리는 촬영이 금지돼 있다.
삼각대와 셀카봉은 전 구역에서 안 된다.
파르테논 갤러리는 유리창 쪽을 본다. 조각을 전시한 방향 그대로 창밖에 실제 언덕이 보이도록 설계돼 있다.
실물과 조각을 한 시야에 두는 게 이 박물관의 핵심이다.
바닥 아래 발굴 현장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입구 쪽 유리 바닥 밑이 고대 주거지다.
이 도시가 왜 땅을 못 파는지가 여기서 설명된다.
요금과 시간은 계속 바뀐다. 출발 전에 박물관 공식 홈페이지를 한 번 연다.
없는 걸 계속 상상했다
아고라에서 반나절을 보내면서 계속 없는 걸 상상했다.
여기 기둥이 있었겠지, 저기 지붕이 얹혔겠지 하면서 걸었다.
유적지를 본다는 게 결국 없어진 걸 채워 넣는 일이라는 걸 그날 알았다.
그런데 그 한복판에 헤파이스토스 신전이 아무 설명 없이 서 있었다.
상상할 필요가 없는 건물 하나가 나머지 전부의 기준이 됐다.
그리스에서 마지막으로 먹은 것도, 마지막으로 본 것도 특별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그날 밤 공항에서 아테네 사흘을 돌아보니 꽉 차 있었다.
그날 밤 비행기로 러시아에 갔다.
지하철을 타자마자 여기가 역이 맞나 싶은 곳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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