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 이드라 2] 항구에서 이십 분만 오르면 아무도 없었다

이드라 여행기 · 2편
관광은 항구에서
삼백 미터쯤에서 끝났다.
그 밖은 그냥
사람이 사는 섬이었다.

항구 골목을 한 바퀴 돌고 나니 열한 시가 안 됐다.

배 시간까지는 여섯 시간이 남아 있었다. 갈 데가 마땅치 않아서 그냥 계속 올라가 보기로 했다.

올라갈수록 마주치는 사람이 줄었다. 어느 골목부터는 발소리가 내 것뿐이었다.

마을이 끝나는 자리

포장이 끝나고 흙길이 시작되는 데서 트럭 한 대를 봤다.

차가 금지된 섬이라고 들었는데 차가 있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쓰레기 수거차만 예외라고 한다.

이 트럭이 그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여기까지는 바퀴가 올라온다.

흙길에 서 있는 작은 트럭
차가 금지된 섬에도 예외는 있다

뒤를 돌아보니 마을이 아래로 내려앉아 있었다.

붉은 지붕이 층층이 겹쳐 있고 그 너머가 바로 바다였다. 항구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마을이 생각보다 작았다.

언덕에서 내려다본 이드라 마을과 그 너머 바다
언덕에 올라가면 마을이 통째로 보인다

길가에 소나무 한 그루가 담장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 아래 철문이 닫혀 있었는데 안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문만 남고 집은 사라진 것 같았다.

기울어진 소나무 아래 닫힌 철문
문은 있는데 문 뒤에 아무것도 없다

언덕 위 하얀 예배당

언덕에는 작은 예배당이 여기저기 있었다. 방 하나 크기에 지붕만 얹은 것들이다.

한 곳은 담장 위로 부겐빌레아가 통째로 넘어와 있었다. 빨간 꽃 뒤로 하얀 종탑과 바다가 겹쳤다.

부겐빌레아가 늘어진 담장과 언덕 위 하얀 예배당
방 하나 크기의 예배당이 언덕마다 있다

문은 대부분 잠겨 있었다. 열린 곳에 들어가 보면 안에 초와 성화가 몇 개 놓여 있는 게 전부였다.

관리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촛대는 깨끗했다.

할머니가 먼저 말을 걸었다

골목에서 백발의 할머니와 마주쳤다.

내가 비켜서려는데 먼저 말을 걸었다. 그리스어였다.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웃기만 했더니 할머니도 웃었다.

손짓으로 어디서 왔냐고 묻는 것 같아서 한국이라고 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 말을 몇 마디 더 하고는 사진을 찍자고 했다.

골목에서 만난 백발의 그리스 할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말이 하나도 안 통했는데 사진은 찍었다

관광객이 뜸한 데까지 올라와서 그런지, 여기서는 사람들이 나를 구경거리로 보지 않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 늘어났다

높이 올라갈수록 빈집이 늘었다.

돌계단은 멀쩡한데 그 위 집은 벽만 남아 있거나, 창틀이 뜯겨 나가 있었다.

위쪽으로 이어지는 돌계단과 벽만 남은 집
돌계단이 담벼락 사이로 계속 올라간다

그래도 사람이 사는 골목은 여전히 예뻤다. 아치 아래로 길이 이어지고 하얀 벽에 파란 문이 달려 있었다.

지팡이를 짚은 주민 한 분이 그 길을 천천히 올라갔다.

돌 아치 아래로 이어지는 이드라의 골목
아치 저편에 바다가 한 조각 보인다

더 가니 지붕이 통째로 내려앉은 집이 나왔다.

이층 창문 자리에 하늘이 그대로 보였다. 이 정도면 오래전에 비운 집이다.

지붕이 무너져 내린 돌집
창문 자리로 하늘이 보인다

짐을 지고 줄지어 내려왔다

한적한 길을 걷는데 앞에서 발굽 소리가 났다.

당나귀 여러 마리가 줄을 지어 내려오고 있었다.

맨 앞에 한 마리가 짐 없이 걷고, 뒤로 짐을 실은 놈들이 따라왔다.

좁은 길을 따라 줄지어 내려오는 당나귀들
앞에 한 마리, 뒤에 짐을 실은 무리

길이 좁아서 벽에 붙어 서서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가까이서 보니 등에 얹은 게 포대 자루만이 아니었다. 물통도 있고 상자도 있었다.

이 당나귀들이 유일한 교통수단이다.
짐을 나르는 이드라섬의 당나귀와 노새
이드라섬의 유일한 교통수단 — 당나귀와 노새

이 섬에서 위쪽 집에 사는 사람은 이사를 몇 번이나 할까 싶었다.

마을 밖은 그냥 산이었다

집이 완전히 끊기고 나서는 마른 관목만 남았다.

그늘이 없었다. 정오가 가까워지니 돌바닥에서 열이 올라왔다.

마른 관목만 남은 이드라의 바위산
집이 끊기면 이런 게 계속 나온다

관광 안내에 나오는 이드라는 항구 사진 한 장이 전부다.

그 사진 밖으로 이십 분만 걸어 나오면 이런 산이 나온다는 건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다.

이 여행에서 가장 맑았던 바다

능선을 따라가다 아래를 봤는데 색이 이상했다.

물이 초록에 가까운 파랑이었다. 바위 사이에 작은 섬 하나가 떠 있고 그 주변만 색이 더 옅었다.

에메랄드빛 바다와 그 위에 뜬 작은 섬
물 색이 이상해서 한참 서 있었다

내려가서 발을 담가 봤다. 발밑 자갈이 하나하나 셀 수 있을 만큼 그대로 보였다.

이 여행에서 본 바다 중에 제일 맑았다. 아이슬란드도 발트해도 여기만큼은 아니었다.

여행 중 가장 맑았던 이드라의 바다
발을 담근 채로 서 있어도 저 멀리 바위 바닥이 다 비쳤다

*바닥의 자갈이 그대로 비친다*

해변에 모래가 없었다. 주먹만 한 자갈이 깔려 있어서 맨발로는 못 걷는다.

보트 한 척이 물 밖으로 끌려 올라와 있었다.

모래 대신 자갈이 깔린 해변에 보트 한 척이 올라와 있다
모래 대신 자갈이다. 발바닥이 꽤 아프다

바로 옆에 테라스를 낸 식당이 있었다. 파라솔 아래 테이블이 바다 쪽으로 붙어 있었다.

앉으면 발밑이 바로 물이다. 값을 보고 그냥 지나쳤다.

바다 쪽으로 붙여 놓은 테라스 식당 자리
파라솔 아래 흰 의자가 물가까지 놓여 있다

조금 더 가니 짚으로 지붕을 얹은 파라솔이 줄지어 서 있었다.

여기는 3유로를 내면 자리 하나를 하루 종일 쓸 수 있다고 했다. 파라솔에 선베드가 딸려 있다.

짚 지붕 파라솔이 줄지어 선 자갈 해변
3유로면 하루 종일이다

해안을 따라 다시 올라가는 길에서는 물 색이 또 달랐다.

깊은 쪽은 잉크를 풀어 놓은 것처럼 진했다.

절벽 아래로 짙푸른 바다가 펼쳐진다
깊은 쪽은 색이 완전히 다르다

마을에서 제일 높은 곳

능선을 돌아 마을 위쪽으로 다시 붙었다.

항구가 발밑에 들어왔다. 요트가 빼곡히 들어차 있고 그 사이로 작은 배들이 오갔다.

요트가 빼곡히 정박한 이드라 항구
아침에 내렸던 그 항구다

제일 높은 데에는 철제 종틀이 서 있었다. 종은 걸려 있는데 줄이 없었다.

여기서 보니 마을이 접시 안에 담긴 것처럼 보였다. 양쪽 산이 마을을 감싸고 그 사이가 바다로 열려 있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선 철제 종틀
여기가 마을에서 제일 높은 자리다

*돌바닥을 걷는 소리 말고는 나는 게 없다*

이드라에서 걸을 때 챙길 것

항구를 벗어나면 편의시설이 없다. 물을 사서 올라가는 게 낫다.

그늘이 거의 없다. 나는 정오에 걸었다가 돌바닥에서 올라오는 열에 고생했다. 오전이나 늦은 오후가 낫다.

바닥이 전부 돌과 계단이다. 샌들보다 밑창이 두꺼운 신발이 낫다.

해안길은 능선길보다 완만하다. 오르막이 부담되면 항구에서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가는 쪽을 먼저 잡는다.

해변에 파라솔과 선베드를 빌려주는 자리가 있다.

하루 3유로 안팎이었고, 자갈이라 깔 것이 없으면 앉아 있기가 어렵다.

돌아오는 배 시간을 먼저 정해 놓고 걷는다. 마지막 배를 놓치면 섬에서 자야 한다.

항구 사진 한 장으로 소비되는 섬

이드라는 항구 사진 한 장으로 소비되는 섬이다.

그 사진에는 요트와 하얀 집이 나오고, 당나귀가 한 마리쯤 서 있다. 나도 그 사진을 보고 왔다.

그런데 그 프레임 밖으로 걸어 나가니 빈집과 마른 산과 아무도 없는 바다가 나왔다.

그쪽이 훨씬 오래 기억에 남았다.

항구에서 골목을 따라 20분이면 마을 꼭대기 종탑에 닿는다.

내려와서 점심을 먹었다.

그날 나는 세 번 밥을 먹었는데 세 번 다 남이 채워 줬다.

이드라 · 3편 중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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