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 쿠알라룸푸르 1] 숙소 리뷰의 쓰레기 이야기, 설마 했는데 진짜였다
문 앞에는 쓰레기가 가득했다.
밤늦게 내린 도시의 첫인상.
홍콩에서 이틀을 채우고 세 번째 나라로 넘어가는 길은 저가항공이었다.
인천에서 홍콩까지 한 번, 홍콩에서 쿠알라룸푸르까지 또 한 번.
석 달을 버텨야 하는 예산이라 국경을 넘는 수단은 거의 자동으로 정해졌다.
가장 싼 걸 탄다. 대신 도착 시간은 내가 못 고른다.
오후 6시쯤 뜨는 비행기였고, 내리면 밤이었다. 첫 밤이 통째로 이동에 들어간다는 뜻이었다.
홍콩을 벗어날 때까지는 아직 J의 여행이었다.
몇 시에 뭘 타고 어디로 갈지 정해두고 그대로 움직였다.
그게 흔들리는 건 조금 뒤의 일이다.

숙소까지 어떻게 갔는지는 klia2에서 시내로, 심야 이동법에 따로 정리해뒀다.
저가항공, 네 시간의 낯익음
공항에서 비는 시간에 어떤 사람은 터미널을 돌고, 어떤 사람은 앉아서 영상을 본다.
나는 체력이 남으면 계속 돈다.
어차피 비행기에서 잘 거니까.
게이트로 걸어가는 길에 면세점 앞을 지나다 토이스토리 완구 매대에서 발을 멈췄다.
플라잉 버즈 피규어가 줄줄이 진열돼 있었다.
딱히 살 것도 아니면서 한참을 구경했다.
비행 시간이 남아도는 여행자의 습관이었다.

게이트에 앉아 창밖을 보니 비행기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처음엔 좌석이 좁다고 투덜댔는데 두 번째부터는 아무렇지 않았다.
저가항공은 싼 대신 뺄 걸 다 뺀다.
좌석 간격이 좁고, 수하물은 따로 사야 하고, 물 한 잔도 돈이다.
기내식도 사전에 주문한 사람만 받는다.
그걸 알고 타면 불편할 게 별로 없다. 모르고 타면 네 시간 내내 아무것도 못 먹는다.

자리에 앉아 셀카를 한 장 남겼다.
벌써 여행이 조금 지나가니까 긴장도 되기 시작했다.
세 나라째인데도 비행기를 탈 때마다 매번 조금씩 낯설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내식이 나왔다.
붉은 트레이에 비닐 포장된 도시락 하나와 종이컵 커피가 같이 왔다. 포장 위에 나시 르막이라고 적혀 있었다.

내 인생의 첫 기내식이었다.
두근두근 뚜껑을 열었다.
흰쌀밥에 삶은 달걀 반쪽, 땅콩, 멸치볶음,
그리고 카레색으로 매콤하게 양념한 고기 한 덩이. 말레이시아 땅을 밟기도 전에 그 나라 음식부터 맛본 셈이었다.
현지식이라 그런지 입에 잘 맞았다.
이 첫 기내식을 시작으로 나는 모든 기내식이 맛있게 느껴지고(고도 때문인가?) 항상 싹싹 비워내는 습관이 생겼다.
돌이켜보면 신라면과 고추장이 슬슬 그리워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현지식이 아무리 입에 맞아도, 여행이 길어지면 결국 익숙한 매운맛을 찾게 된다.

내려서부터가 진짜였다
klia2에 내리니 밤이 완전히 깊어 있었다.
터미널 안은 캐리어를 끄는 사람들로 여전히 붐볐는데, 다들 어디론가 서둘러 빠져나가는 분위기였다.
머리 위로 큼직한 안내판이 걸려 있었다.
Pick-Up Point, Bus & Taxi, Car Rental,
KLIA Ekspres. 시내로 들어가는 방법은 다 저기 적혀 있는데,
이 늦은 시간에 뭘 타야 하는지는 안내판이 알려주지 않았다.

공항철도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창밖으로 활주로 조명만 스쳐 지나갔다.
차 안쪽 선반에는 캐리어가 층층이 쌓여 있었다. 이 시간에 움직이는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다.

이어 어두운 지하도로 내려가 KL 모노레일 개찰구 앞에 도착했다.
이 시간엔 선풍기 한 대만 돌아가고 있었고, 벽에 붙은 노선도만 밝게 빛났다.
툰 삼반탄, 부킷빈탕, 라자 출란, 부킷 나나스. 낯선 이름들을 하나씩 읽으며 어디서 내려야 할지 가늠했다.

거기서 얼마쯤 더 가서는 결국 택시로 갈아탔다.
우버도 그랩도 흔치 않던 시절이라, 늦은 밤 낯선 도시에서 택시에 오르는 건 은근히 마음 졸이는 일이었다.
다행히 기사가 친절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운이었다.
창밖으로 노란 대형 간판과 신호등 불빛이 흐릿하게 지나갔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 찍은 사진이라 다 번져 있는데, 그날 밤의 긴장이 그대로 담긴 것 같아 지우지 않고 남겨뒀다.

벙커홈, 그리고 새벽의 골목
숙소는 Alor Bunker Home이었다.
체크인 데스크 옆에 이용규칙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조용히 할 시간, 짐은 전날 밤 미리 싸둘 것,
방문객은 로비에서만. 맨 아래 줄에 와이파이 비밀번호가 적혀 있었다.
bunkerhome86. 이 무렵엔 저렴한 도미토리 위주로 숙소를 잡고 다녔다.
방은 시원했고, 컨셉은 감옥과 던전 그 중간 어딘가에 위치한 도미토리였다.
방 안은 대체로 조용했는데, 로비로 나오면 분위기가 달랐다.
다들 스스럼없이 말을 붙이고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는, 열려 있는 곳이었다.

방을 배정받고 짐을 내려놓은 뒤 골목으로 다시 나왔다.
하늘이 막 밝아오는 시각이었다.
간판을 올려다보니 검은 차양에 흰 글씨가 보였다.
"ALOR Bunker home — your resting hub"라고 적혀 있었고,
그 너머로 살구색 고층 콘도가 새벽빛을 받아 서 있었다.
맨발로 돌아다녀도 좋을 만큼 바닥이 시원했다.
그 돌바닥의 감촉이 유독 오래 기억에 남는 숙소였다.
에어컨까지 나와서 잠자리도 쾌적했다.

숙소 바로 옆 골목은 딴판이었다.
초록색 대형 쓰레기통 옆으로 비닐봉지가 산더미로 쌓여 있었고, 까마귀와 비둘기 몇 마리가 그 위를 쪼고 있었다.
숙소 자체는 좋았는데, 딱 하나 아쉬운 점을 꼽으라면 이 골목이었다.
예약 전 리뷰에서 숙소 앞 쓰레기 이야기를 봤는데, 설마 하고 왔더니 실제로 그래서 깜짝 놀랐다.
쓰레기는 리뷰에도 가득했다.
이것 좀 어떻게 해주세요.. 미화할 생각 없이 그대로 찍었다.
그 뒤로 숙소를 드나들 때마다 이 쓰레기 더미와 한 번씩 눈을 맞추는 게 묘한 일과가 됐다.
여행 나흘째, 세 번째 나라의 첫인상은 깔끔한 숙소 간판과 그 바로 옆 쓰레기 더미가 함께 만든 것이었다.

몇 시간 뒤면 날이 완전히 밝고, 나는 페트로나스 트윈타워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그날 밤, 이 숙소 로비에서 만난 한 사람이 내 일정을 통째로 바꿔놓는다.
klia2에서 시내로, 심야 이동법
klia2는 24시간 돌아가는 공항이라 늦은 밤에 내려도 오갈 방법 자체는 있다.
가장 빠른 건 KLIA 익스프레스로, KL 센트럴까지 논스톱 약 28분이다.
심야 운행이 계속 보강되는 추세라 자정을 넘긴 시간대까지 열차가 다니는 날도 있지만,
배차 간격이 낮보다 훨씬 뜨문뜨문해서 시간표를 미리 확인하고 움직이는 게 안전하다.
좀 더 저렴하게 가려면 공항버스가 있다.
KL 센트럴이나 시내 주요 지점까지 RM12 안팎,
1시간에서 1시간 반쯤 걸리는데 이 역시 심야엔 배차가 줄어든다.
그랩과 택시는 공항 밖에 정류 지점이 따로 있고 24시간 잡을 수 있지만, 늦은 밤에는 요금이 붙는 경우가 많다.
짐이 많고 늦은 시간이라면 나처럼 대중교통과 택시를 섞어 타는 것도 방법이다.
다녀와서
Alor Bunker Home은 지금은 문을 닫아 더 이상 예약할 수 없는 숙소가 됐다.
그래서인지 이날 밤이 90일간의 세계일주 중에서도 유독 또렷하게 남아 있다.
밤 비행기 하나 탔을 뿐인데 그 하룻밤 사이에 낯선 공항과 심야 대중교통과 숙소 골목을 한 번에 마주쳤다.
숙소를 고를 때 리뷰의 낮은 별점은 대충 흘려 읽는 편이었다.
쓰레기 이야기도 그랬다. 설마 그 정도겠어 하고 예약했다.
그 뒤로는 리뷰에서 같은 불만이 두 번 이상 나오면 그건 사실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싼 숙소에서 아낀 돈보다, 그걸 몰랐을 때 치르는 값이 더 크다는 것도 이 골목에서 배웠다.
다시는 안 가기로 했다.
다음 일정을 통째로 지워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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