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 쿠알라룸푸르 4] 페낭 가는 법, 비행기·버스·기차 중 뭘 타야 하나
페낭으로 갔다.
안 정한 채였다.
새벽까지 함자와 놀다가 그대로 짐을 쌌다.
몇 시간 못 잔 채로 숙소를 나섰는데 이상하게 피곤한 줄도 몰랐다.
페낭에서 뭘 볼지도, 어디서 잘지도 정해두지 않았다.
숙소 예약도 안 했다. 가서 발로 찾으면 되겠지 싶었다.
수단은 정해져 있었다. 페낭까지는 버스로 간다.

이 도시는 며칠 머무는 동안 내내 공사 중이었다.
길 하나 건너면 또 가림막이 나오고, 그 뒤로 새 건물이 올라가고 있었다.
지금 KL에서 페낭 가는 법은 글 끝에 따로 정리해뒀다 — 세 가지 수단 비교 · AeroLine은 지금.
안내소 직원이 적어준 메모
체크아웃을 하면서 안내소 직원에게 페낭에 가면 뭘 봐야 하냐고 물었다.
계획이 없어서 물어본 거였다.
직원은 종이 한 장을 뜯더니 그 자리에서 뭔가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Chulia Street, Heritage Walk,
그리고 화살표 하나에 budget hotel.

도착해서 숙소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니 지도 대신 손으로 그려준 셈이었다.
급하게 휘갈긴 것도 아니었다.
한 줄 적고 이건 어디고 저건 뭐고 설명해주고,
다시 한 줄 적고. 자기 일도 아닌데 차분하게 앉아서 끝까지 적어주는 걸 옆에서 보고 있자니 감동이었다.
체크아웃하는 손님 하나한테 이렇게까지 해주는구나 싶었다.
이 종이 한 장을 잃어버릴까 봐 스마트폰으로도, 카메라로도 몇 번을 다시 찍어뒀다.

밥이 나오는 고속버스
버스는 다른 호텔 로비에서 출발했다.
Corus Hotel. 표에는 KL-PNG, 좌석 10C,
RM60이라고 적혀 있었고 출발 시각은 목요일 오전 9시 30분이었다.
짐표 두 장을 공짜로 붙여주는 것까지 야무졌다.

버스에 올라타고 나서야 이게 그냥 버스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좌석은 리클라이너였고, 등받이마다 개인 모니터가 붙어 있었다.
화면을 켜니 2NE1과 포미닛, AOA, 에이핑크 같은 한국 아이돌 뮤직비디오 목록이 떴다.
당시 한국에는 버스에 개인 모니터를 달아둔 노선이 흔치 않아서,
화면을 이리저리 넘겨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잘 갔다.
말레이시아 고속버스에서 한국 아이돌 목록을 마주하니 기분이 묘하게 좋기도 했다.

이 나라는 실내에만 들어가면 에어컨을 세게 틀어놔서, 밖에서 땀을 흘리다 들어가면 금세 식었다.
리클라이너 좌석에 앉아 분홍 베개까지 받쳐두고 사진을 한 장 남겼는데, 우등고속이라는 말이 딱 맞았다.
그렇게 이것저것 신기해서 다 눌러보다가, 결국은 잤다.
밤을 꼬박 새운 몸이 리클라이너에 눕혀지니 버틸 재간이 없었다.
눈을 떠보니 도착이었다.
밤새고 탄 장거리 버스가 이렇게 편할 수도 있구나 싶었다.

목록을 훑다가 아는 노래가 나오면 그것만 골라 틀었다.
말레이시아 고속버스 좌석에 앉아 한국 아이돌 목록을 넘기고 있자니,
내가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건지 잠깐 헷갈렸다.

점심때가 되자 승무원이 도시락을 나눠줬다.
볶음 미훈과 두부조림, 채소가 담긴 도시락이었다.
버스에서 기내식처럼 식사가 나온다는 게 신기해서 뚜껑을 열기 전에 사진부터 찍었다.
밥이 나온다는 게 이 버스의 킬링 포인트였다.
딱 기내식 같은 밥이었다.
재밌었던 건 정작 먹는 사람이 나 말고 별로 없었다는 점이다.
다들 받아만 두고 손을 안 대거나 아예 신청을 안 한 눈치였다.
나만 잘 모르고 시켰던 셈인데, 그래도 후회는 없다.
관광객이라면 한 번쯤 이런 걸 시켜보게 되지 않나 싶다.

신발을 두고 내린 날
그날 기록에는 "택시에 신발을 두고 내렸다가 기사가 찾아줬다"는 한 줄이 남아 있다.
정작 그 순간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밤을 새운 데다 버스에서 실컷 자고 내린 직후라,
아마 짐만 챙겨 내리고 벗어둔 신발을 그대로 두고 나왔을 것이다.
기사가 뒤에서 불러 세워 신발을 건네주는 장면만 흐릿하게 남아 있다.
배낭 하나에 신발 한 켤레로 두 달을 버티던 때라, 그걸 잃어버렸으면 여행 자체가 꽤 성가셔졌을 거다.
밤을 새우고 움직이면 이런 걸 흘리고 다니게 된다는 것도 그때 배웠다.
버스는 몇 시간을 달려 페낭 섬으로 들어가는 다리 위에 올라섰다.
케이블이 부챗살처럼 늘어진 사장교였다.
창밖으로 바다가 펼쳐지고 그 위로 다리가 곧게 뻗어 있는 걸 보면서, 정말 섬으로 들어가는구나 싶었다.

Sungai Nibong 터미널에 내려서는 로컬 버스로 갈아탔다.
솔직히 이 나라 로컬 버스는 끝까지 헷갈렸다.
노선 번호도 정류장 이름도 눈에 잘 안 들어와서, 결국 방법은 하나였다.
옆 사람한테 영어 되냐고 물어보고 이 버스 맞냐고 확인하는 것.
이날도 그렇게 물어서 탔다.
터미널에 내려서 아침에 받은 메모를 다시 꺼냈다.
접힌 채로 앞면만 보고 다녔는데, 펼치니 거기에도 글씨가 있었다.

bus to KOMTAR, Rapid bus.
나는 페낭에 가면 뭘 봐야 하냐고만 물었다.
이 사람은 내가 묻지도 않은 것까지 적어둔 거였다.
표 값은 2링깃이었다.
이 표 한 장으로 시내까지 들어갈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헷갈렸던 건 요금이 아니라 이 번호였다.
정류장 표지판을 봐도 어느 게 내가 탈 것인지 알 수 없었고,
결국 버스 앞유리에 걸린 판을 보고서야 확신이 섰다.
버스가 조지타운 시내로 들어서자 세계유산지구라는 안내판이 보였다.
조지타운은 2008년 말라카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동네였다.

말라카와 함께 묶여 등재된 곳이라, 이 동네는 건물 하나를 마음대로 고치지 못한다.
상점가가 낡은 채로 서 있는 건 그래서였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카피탄 클링 모스크 앞에는 삼륜 트라이쇼가 줄지어 서 있었고,
골목 안쪽으로는 붉은 등롱을 매단 중국식 상점가가 이어졌다.
모스크 첨탑을 배경으로 메모를 다시 꺼내 확인했다.
계획 없이 왔는데도 이 종이 한 장 덕분에 길을 잃지 않았다.

펼쳐보니 아침에 못 본 줄이 하나 더 있었다.
Ayer Itam - Kek Lok Si Temple.
종이가 접혀 있어서 그때까지 안 보였던 것뿐, 처음부터 적혀 있던 글씨였다.

벽마다 그림이었다
골목 안쪽으로 들어서니 벽마다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고양이 한 마리를 노리는 쥐 그림 앞에 몇 사람이 서 있었고,
조금 더 걸어가니 파란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그려진 벽이 나타났다.
벽화마다 앞에 설 자리가 나 있어서, 골목을 따라가기만 해도 다음 그림이 나왔다.
사람이 몰려 줄을 서는 정도는 아니었다.
워낙 더워서 다들 밖에 오래 나와 있지 않는 눈치였다.
덕분에 벽화 앞에 서면 대체로 나 혼자였고, 도시 전체가 조용했다.
세계문화유산 지구라는 이름에서 상상한 북적임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벽화들은 대부분 2012년에 한 리투아니아 작가가 그린 것이다.
관광용으로 급하게 칠한 게 아니라 조지타운 축제에 맞춰 작업한 연작이라,
벽마다 그 자리에 맞는 소재가 하나씩 들어가 있다.

잘 곳은 그날 걸어 다니면서 정했다.
메모에 적힌 대로 저렴한 숙소가 모여 있는 골목을 찾아 들어가 발품을 팔았고,
그렇게 75 트래블러스 로지에 짐을 풀었다.
예약도 없이 도착해서 방을 구한 게 이 여행에서 처음이었는데, 의외로 별일 아니었다.
조지타운의 첫인상은 그랬다.
벽화가 예쁘고 조용한 도시였다.
계획 없이 왔는데도 이상하게 무섭지 않았다.
아침에 받은 종이 한 장이 도착해서까지 쓸모가 있었던 게 컸다.
지금 KL에서 페낭 가는 법
지금은 셋 중 하나를 고르면 된다.
| 수단 | 걸리는 시간 | 편도 요금 | 출발지 |
|---|---|---|---|
| 비행기 | 약 1시간 | 5만 원대~ |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
| 고속버스 | 5~6시간 | 1만 원 안팎 | 남부 터미널(TBS) |
| 기차 KTM ETS | 3시간 35분~4시간 20분 + 페리 10분 | RM79~(약 2만 4천 원) | KL 센트럴 |
제일 빠른 건 비행기다.
말레이시아항공·에어아시아·바틱에어 말레이시아·파이어플라이가 직항을 운항한다.
제일 싼 건 버스이고, 대신 반나절이 통째로 들어간다.
기차는 그 사이에 있다.
KL 센트럴에서 ETS를 타면 버터워스까지 가고, 거기서 페리로 10분만 건너면 조지타운이다.
시간을 사려면 비행기, 돈을 아끼려면 버스, 둘 다 어중간하게 챙기려면 기차다.
그때 나는 이 셋 중 어디에도 없던 AeroLine 고속버스를 탔다.
AeroLine, 지금도 다니고 있을까
지금은 이 노선으로 KL을 오갈 수 없다.
AeroLine은 최근 말레이시아 정부가 지정 터미널(1 우타마·라라포트·IOI시티몰)에
서만 운행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아예 쿠알라룸푸르를 승하차 지점에서 빼버렸다.
그 조건을 받아들이느니 KL 노선 자체를 접겠다는 회사 쪽 결정이었다고 한다.
Corus Hotel 로비에서 타던 그 버스를 지금은 KL에서 못 탄다.

간판에 적힌 문구가 그 회사가 뭘 팔려고 했는지 그대로 말해준다.
공항도 없고 번거로움도 없이 비행기처럼 타라는 것.
개인 모니터로 K팝 뮤직비디오를 보고 도시락을 받아먹던 그 노선이
이제 이 도시에는 없다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든다.
다녀와서
이날은 아무것도 정해두지 않고 남이 적어준 메모 한 장에 기대 움직였다.
앞면을 보고 버스를 탔고, 뒷면을 보고 시내로 들어갔고, 접힌 줄에서 절까지 하나 더 나왔다.
계획이 없어도 어떻게든 된다는 걸 그때 처음 배웠다.
지금도 여행지에서 길을 물을 일이 생기면, 그날 받아 든 종이 한 장이 떠오른다.
에어컨이 없었다.
천장 선풍기 하나로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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