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 포리 6] 홈스테이 마지막 날, 타로카드 점괘와 알파카를 만난 하루

포리 여행기 · 5편
마지막 날 아침은
타로카드로 시작됐다.
태어나 처음 본 알파카,
난생처음 신어본 롤러스케이트.

점괘로 문을 연 그 하루는 뜻밖의 순서로 이어졌다. 낯선 나라에서 한 가족의 집에 머무는 여행이 아니었다면 겪어보지 못했을 하루였다.

마지막 아침, 타로카드 점괘를 봤다

손에 든 오라클 카드 상자, 표지에 유니콘 그림이 있다
이 카드로 점을 봐줬다

떠나는 날 아침, 마르자 할머니가 타로카드 한 벌을 꺼내 오셨다. 손님이 떠나기 전 심심풀이로 봐주시는 건 줄 알았는데, 카드를 섞고 나눠 뽑는 손길이 제법 진지했다.

여행의 앞날을 물어보라고 하셔서 한 장을 뽑았다.

손에 든 타로카드, 날개 달린 백마 그림에 LOVE라고 적혀 있다
날개 달린 백마가 그려진 카드에 LOVE라는 글자가 큼직하게 적혀 있었다

카드 아래쪽엔 "The answer that you're seeking is love"라는 문구가 있었다. 뜻을 몰라도 그림만으로 마음이 놓이는 카드였다.

재정 상태도 궁금해서 한 장 더 뽑았더니, 이번엔 인내심을 뜻하는 카드가 나왔다. 마침 그날 한국 증시가 크게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던 참이라, 카드 속 단어 하나가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다행히 며칠 뒤 다시 회복됐다는 소식을 나중에 들었다.

타로카드까지 봐주실 정도로, 마르자 할머니는 마지막까지 살뜰히 챙겨주셨다. 손님을 떠나보내는 아쉬움을 그런 방식으로 달래시는 분 같았다.

알파카와 처음 마주치다

타로를 보고 나서 다 같이 차를 타고 근교 공원으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그때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동물이었다.

*건초를 먹는 알파카 두 마리*

지붕 그늘 아래 옹기종기 모인 알파카 여러 마리
지붕 아래 그늘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알파카들. 한참을 지켜봐도 그늘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털로 뒤덮인 몸에 목이 길쭉한 걸 보고, 순간 만화 캐릭터 하나가 떠올랐다. 가까이 다가가 봐도 알파카들은 그늘에서 나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얼굴을 제대로 보여줄 마음이 없는 눈치였다.

공원은 생각보다 넓었다. 마르자 할머니는 여름 휴가철이면 이 일대가 캠핑객으로 가득 찬다고 알려주셨다. 알파카 우리 옆으로는 닭장도 있어서, 닭과 꿩이 함께 지내는 모습도 구경할 수 있었다.

처음 타본 롤러스케이트와 앵그리버드 놀이터

넓은 아스팔트 공터에서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
공터가 통째로 연습장이었다
현관에 놓인 인라인 스케이트와 보호대, 헬멧
장비부터 챙겨 신었다

같은 공원에서 롤러스케이트도 처음 배웠다. 헬멧과 무릎보호대부터 챙겨 쓰고, 마르자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자세를 잡았다.

헬멧과 인라인스케이트, 롤러스키 폴을 갖추고 자동차 옆에 선 모습
헬멧과 인라인스케이트에 긴 폴까지 쥔 모습. 넘어질 각오로 나섰는데 생각보다 잘 탔다

손에 쥔 폴이 낯설어 물어보니, 그냥 타는 인라인스케이트가 아니라 폴을 짚는 방식이라고 했다. 자세한 사연은 뒤에서 핀란드식 롤러스키가 뭔지 → 다시 풀어본다. 초등학생 때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본 적은 있어도 폴을 짚고 균형을 잡는 건 처음이라, 마르자 할머니가 오히려 놀라실 만큼 금방 감을 잡았다.

바로 옆 놀이터에는 낯익은 조형물이 있었다. 앵그리버드 캐릭터들이었다. 핀란드 게임사 로비오가 만든 캐릭터라는 걸 그 자리에서 실감했다. 다 큰 어른이 놀이터 조형물 앞에서 사진을 찍어대니, 옆에 있던 꼬맹이가 이상하게 쳐다봤을 법도 하다.

이름 없는 해변과 겨울에 사라지는 다리

공원 한쪽에는 이름조차 없는 작은 해변이 있었다. 물가에 서 있던 아이 하나가 유독 멀어 보여서, 이 나라의 하늘과 땅이 유난히 넓게 느껴졌다.

건너던 다리 하나를 두고는 마르자 할머니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겨울이 되면 이 다리를 통째로 걷어내서, 지도에서도 잠깐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강이 얼어붙는 겨울 몇 달은 다리 없이 지낸다는 얘기가 낯설면서도 흥미로웠다. 건너편 건물들 이야기도 이어졌지만, 절반은 흘려듣고 절반은 사진 찍기에 바빴다. 말로 다 담기 힘든 풍경 앞에서는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마지막 점심과 작별 선물

떠나는 날 점심은 오븐 요리였다. 오븐에 구운 감자와 돼지고기, 그 옆에서 육즙에 달여진 양파와 당근까지 상에 올랐다.

짐을 다 챙기고 나니 마르자 할머니가 먹을거리를 한 아름 챙겨주셨다.

식탁 위에 놓인 당근 한 봉지, 과일주스, 초콜릿, 살미아크 사탕 상자
당근 한 봉지와 과일주스, 초콜릿, 살미아크 사탕 상자가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파제르(Fazer) 초콜릿과 짠맛 캔디 살미아크, 자일리톨까지 손에 쥐여주셨다. 살미아크는 감초에 염화암모늄을 더한 핀란드식 짠맛 사탕인데, 1930년대 약국에서 기침약 대신 팔던 게 시작이라는 이야기를 나중에 알았다. 외국인이 먹기 힘들어한다는 말을 익히 들어서 반신반의하며 받았다. 자일리톨은 정작 사진에 담지 못했다.

먹을거리를 챙겨주는 손이 다음 구간까지 계산하고 있었다. 당근 한 봉지와 주스는 그날 저녁 버스에서 먹었고, 초콜릿과 사탕은 며칠을 더 갔다.

사흘 동안 받은 것만 세어봤다

봉지를 배낭에 넣으면서 받은 걸 세어봤다. 잠자리 사흘, 아침 세 번과 저녁 세 번, 사우나, 해변까지 태워다 준 차, 숲까지 태워다 준 차, 파이 한 판, 연어 한 덩이, 보드카 한 잔, 점괘 두 장, 롤러스케이트 강습, 그리고 다음 구간 비상식량.

내가 낸 돈은 없었다.

포리가 처음도 아니었다. 이 여행은 시작부터 계속 이런 식이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친구들이 나를 데리고 다녔다. 밤에 낯선 차에 태워 팬미팅에 데려가고, 바나나 잎 위에 밥을 얹어 먹였다.

웨일스에서는 버스 노선을 물어본 사람이 그날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그 집에서 며칠을 잤다. 드라이브스루에서 밥을 사줬고, 아버지와 동네 펍에 데려갔고, 떠나는 날 새벽에는 마당에서 바비큐를 해줬다. 카디프까지 차로 태워다 준 것도 그 사람들이다.

리옹에서는 밤에 버스를 반대 방향으로 탔다. 길을 잃고 서 있는데 식사하던 가족이 버스가 끊긴 걸 알려주고 숙소 방향까지 태워다 줬다.

그리고 포리였다.

사람이 원래 착한지 아닌지는 책으로 논쟁하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 여행은 그 논쟁을 몸으로 겪게 했다. 나를 재워주고 먹여준 사람들에게 나는 아무 관계도 아니었다. 갚을 방법이 없는 상대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내주는 사람이 나라를 옮겨도 계속 있었다.

요즘 이런 장면은 영상으로 본다. 현지인 집에 초대받아 사우나에 들어가고 숲에서 열매를 따는 여행 영상은 조회수가 잘 나온다. 그런 영상은 대개 사전에 연락이 닿아 있거나 통역이 붙어 있다. 나는 관중석에서 받은 손 명함 한 장으로 그 집 거실에 앉아 있었다. 대화의 절반은 손짓이었다.

포리 키르유린루오토, 여름에만 만나는 알파카

이날 다녀온 공원은 포리 시내를 가로지르는 코케마엔강 하구의 섬 공원, 키르유린루오토(Kirjurinluoto)다. 이 공원은 여름철에만 알파카와 어린 염소, 양, 공작 같은 동물을 데려다 놓는 계절 사육장을 운영한다. 겨울에는 동물들을 따뜻한 곳으로 옮기기 때문에, 알파카를 보려면 늦여름 시즌에 맞춰 가야 한다.

같은 공원 안 펠레 헤르만니(Pelle Hermanni) 놀이터에는 해적선과 앵그리버드 코너, 아이들을 위한 물놀이장이 있다. 앵그리버드는 핀란드 게임사 로비오의 대표작이니, 핀란드 여행 중 이런 조형물을 마주치는 게 그리 낯선 일은 아니다. 공원 입장은 무료이고, 여름 휴가철에는 강변 캠핑장도 함께 붐빈다.

핀란드식 롤러스키가 뭐길래

핀란드에서는 겨울 크로스컨트리 스키 감각을 여름에도 유지하려고 바퀴 달린 스키에 폴을 짚고 타는 훈련을 한다. 이걸 롤러스키(rullahiihto)라 부르는데, 폴 끝에는 눈밭에서 쓰는 고무 바스켓 대신 카바이드 촉이 달려 있어 아스팔트에서도 잘 미끄러지지 않는다. 이날 신었던 인라인스케이트에 폴까지 쥔 조합은, 정확히는 이 여름 훈련 방식을 흉내 낸 셈이었다. 핀란드·노르웨이·이탈리아 등에서는 아예 전용 트랙을 깔아둘 만큼 이 종목이 대중적이고, 국가대표급 선수들도 여름 내내 이 방식으로 체력을 유지한다고 한다.

포리 여행 기본 정보

포리는 핀란드 남서부 사타쿤타 지역의 소도시로, 헬싱키에서 기차나 버스로 두 시간 반 정도 걸린다. 코케마엔강 하구에 자리한 만큼 여름이면 강변 공원과 해변을 함께 즐기기 좋다. 개인 가정집에 머무는 홈스테이로 방문한다면, 현지인의 여름 루틴 — 공원 산책, 계절 사육장 구경, 오븐 요리 저녁 — 을 그대로 따라가 보는 것도 여행의 한 방법이다.

이 집에 감사 편지를 썼다

이 집에 감사 편지를 썼다. 포리를 떠나 닷새 뒤, 스웨덴을 거쳐 이스탄불에 도착한 날이었다. 그 편지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당신의 집을 방문한지 5일이 지났습니다.

제가 당신과 함께 한 3일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산타클로스가 사는 나라에서 당신의 집에 머물 수 있던 것은 축복이었습니다.

함께 지냈던 2박 3일 동안 모자람 없이 큰 사랑을 선물해 주셔서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당신을 통해 핀란드, 포리 마을사람들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르자와 에라키,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리옹에서 받은 그 손 명함 이야기도 편지에 적었다. '왜 걱정을 하는가'라는 문구를 처음 봤을 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

당신과 3일을 지내면서 이 문구를 좋아하게 만들었습니다.

마지막 줄은 영어로 적었다.

Thank you for everything.
I wish you guys are happy forever.

리옹 트랙에서 스친 인연이 낯선 도시의 집 한 채로 이어졌던 사흘이었다. 사우나도, 블루베리 파이도, 타로카드도 계획에는 없던 일들이었다. 전부 이 집에 묵었기 때문에 생긴 하루하루였다.

이 집에서 본 건 결국 관광지가 아니라 생활 방식이었다. 숲에서 딴 베리를 굽고, 오븐에 감자와 고기를 넣고, 저녁이면 사우나에 들어가고, 여름엔 스키를 못 타니 스키 폴을 들고 롤러블레이드를 타는 하루. 그 루틴이 사람을 어떻게 만드는지는 나중에 알았다.

마르자 할머니는 지금도 트랙에 서신다. 여름마다 대회에 나가시고, 올해만 자기 기록을 여러 번 갈아치우셨다는 소식을 본다. 얼마 전 북유럽 대회 허들 경기에서는 세 번째 허들에 발이 걸려 트랙에 나뒹구셨는데, 일어나서 남은 허들을 다 넘고 또 한 번 넘어지신 뒤에 결국 조깅으로 결승선까지 들어오셨다고 했다. 관중석 갈채가 대단했다는 말이 그 글에 붙어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이미 트랙을 뛰고 계셨던 분이 아직 같은 자리에 계신다. 소파 옆 선반에 걸려 있던 메달을 집에서 제일 아끼는 물건이라고 했던 이유가 그제야 다 이해됐다.

그다음은 포리를 떠나 에스푸에서 만난 또 다른 옛 친구, 그리고 투르크에서 시작된 자유여행 이야기였다.

포리 · 7편 중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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