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 투르쿠 1] 투르쿠에서 혼자 다니는 여행이 시작됐다, 휴대폰이 죽은 날이었다
다시 혼자가 됐다.
완전히 죽었다.
투르쿠는 핀란드의 옛 수도다.
핀란드에서 엿새를 남의 집에서 지냈다.
앞의 사흘은 리옹에서 만난 현지인 집, 뒤의 사흘은 안양에서 같이 놀던 소꿉친구 집이었다.
밥을 사 먹은 기억이 거의 없다.
그러다 투르쿠에서 다시 혼자가 됐다.
마지막 아침은 떡국이었다

떠나는 날 아침에 떡국이 나왔다.
핀란드에서 떡국을 먹을 줄은 몰랐다.
국물이 있는 한국 음식을 두 달 만에 먹는 일이라 그릇을 오래 붙들고 있었다.

두 시간쯤 뒤에 한 그릇이 더 나왔다.
친구가 야심작이라며 낸 냉파스타였다.
파마산 가루와 올리브를 섞었고 말린 토마토가 들어갔다.
차가운데 면이 탱탱해서 계속 집어 먹었다.
말린 토마토가 이렇게 강한 재료인 줄 그날 알았다.
점심에 한 번 더 상이 차려졌다. 파스타를 접시에 덜어 주면서 이게 마지막이라고 했다.

핀란드에 있는 동안 잘 먹었다. 현지식도 좋았지만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었던 게 컸다.
정류장 번호를 외워서 갔다

친구가 알려준 정류장 번호를 외워서 갔다.
휴대폰이 이미 반쯤 죽어 있어서 지도를 켤 수가 없었다.
도로변에 서 있는 표지판 하나를 찾는 게 그날 첫 과제였다.
가 보니 나 말고도 세 사람이 서 있었다.
다들 투르쿠로 가는 외국인이었다.
같은 버스를 기다리는 처지라는 걸 알고 나서는 마음이 좀 놓였다.
에스포에서 투르쿠는 장거리 버스로 두 시간 안팎이다. 헬싱키를 거치지 않고 바로 가는 편이 있다.
버스가 도시를 벗어나자 창밖이 통째로 들판이었다.
밭과 숲이 번갈아 나오고 그 사이에 빨간 집이 하나씩 박혀 있었다.

중간에 한 번 섰다. 주유소 겸 휴게소인데 차 몇 대가 서 있고 사람은 거의 없었다.

휴대폰이 죽었다

리스본에서 액정이 깨진 뒤로 계속 위태로웠다.
그 상태로 몇 나라를 더 돌았는데, 친구 집에서 두 번 떨어뜨린 게 결정타였다.
화면이 완전히 나갔다.
지도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여행자라는 걸 그때 실감했다.
도시 이름과 정류장 번호를 외워서 움직이는 하루가 시작됐다.
투르쿠에 내렸다

투르쿠는 핀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다.
1229년에 도시로 언급된 기록이 있고, 1812년에 수도 자리를 헬싱키에 넘겨주기 전까지 이 나라의 중심이었다.
강 건너 공원에서 첨탑이 보였다.
투르쿠 대성당인데 높이가 101미터다.
핀란드 루터교회 대주교좌가 여기 있어서 이 도시의 상징으로 통한다.
도시 어디서 걷든 이 첨탑이 시야에 들어온다.

종이 지도를 펼쳐 들고 걸었다.
휴대폰이 죽은 여행자가 하는 일이다.
손에 지도를 들고 다니니 오히려 길가에 뭐가 있는지 더 봤다.
새 폰을 99유로에 샀다

보행자 전용 거리를 따라 걸으니 상점이 이어졌다. 저녁이 다 됐는데 해가 아직 높아서 시간 감각이 어긋났다.

거리 끝에 유리 지붕을 얹은 아케이드가 있었다. 그 안에 통신사 매장이 몰려 있었다.

시내 쇼핑몰에 들어가 삼성 매장과 애플 매장을 차례로 갔다. 결론은 빨랐다.
99유로짜리 보급형을 골랐다.
한국 돈으로 14만 원쯤이었다.
애플 제품도 잠깐 봤는데 그때 유로가 1400원대까지 올라 있어서 계산이 안 됐다.
여행 두 달째에 예산이 빡빡한 사람이 살 물건이 아니었다.
기존 유심을 새 폰에 꽂으니 그대로 잡혔다. 지도가 다시 열리는 순간이 이 여행에서 손에 꼽히게 반가웠다.
와이파이 목록을 여니 화면이 한글로 떴다. 낯선 도시 한복판에서 산 폰인데 설정 언어부터 한국어가 잡혀 있었다.

투르쿠 실전 정보
헬싱키에서 투르쿠는 VR 열차로 가장 빠른 편이 1시간 52분이고, 평일엔 거의 매시간 한 대꼴로 다닌다.
장거리 버스도 있어서 예산에 맞춰 고르면 된다.
에스포에서 출발하면 헬싱키를 거치지 않는 버스가 두 시간 안팎이다.
시내는 걸어서 다닐 크기다.
아우라 강을 따라 대성당에서 성까지 이어지는 선을 따라가면 주요한 데를 대체로 지난다.
대중교통은 투르쿠가 푈리(Föli)라서 헬싱키권의 HSL과 앱이 다르다.
두 달 만에 처음 혼자 걷는 날
여행 두 달 만에 처음으로 혼자 걷는 날이었다.
그동안은 늘 누군가의 집에 얹혀 있었고, 그 집 사람이 오늘 뭘 할지 정해 줬다. 오늘은 아무도 없었다.
휴대폰까지 죽어서 지도도 없었다.
그런데 불안하지가 않았다.
여행 초반이었으면 정류장 번호를 잘못 외웠을까 봐 밤새 뒤척였다.
두 달이 그걸 바꿔 놨다.
보러 간 성은 문을 닫는 중이었는데 그 앞 풀밭이 더 볼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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