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 알렉산드로폴리스 2] 표를 끊었을 때 이미 출발 시각이 지나 있었다, 아테네행 14시간 야간열차
이미 출발 시각이 지나 있었다.
타고 나서 알았다.
바다에서 나와 항구 옆 매표소로 갔다.
거기서 아테네행 표를 끊었고, 그 뒤로 벌어진 일이 이 여행에서 제일 긴 이동이 됐다.
표를 끊었는데 이미 출발 시각이 지나 있었다

표에 15시 11분이라고 찍혀 있었다.
그런데 표를 손에 쥔 시각이 이미 15시 30분을 넘겨 있었다.
역무원은 아무렇지 않아 했다. 나만 표와 시계를 번갈아 봤다.
그러고도 두 시간을 더 기다렸다.

플랫폼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초조해하지 않았다.
나만 몇 번씩 선로 끝을 내다봤다.
기차가 통째로 낙서판이었다

기다리면서 옆 선로에 선 기차를 봤다.
객차 옆면이 통째로 낙서였다. 세워둔 칸을 하나씩 보는데 전부 그랬다.
내가 탈 기차도 마찬가지였다.
낙서를 지우지 않는 건지 지울 여력이 없는 건지 그때는 알 수 없었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낙서판 같다고 적어놨다.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일

기다리는 동안 옆에 있던 여성과 이야기를 하게 됐다.
직업을 물으니 소셜워커라고 했다.
무슨 일을 하느냐고 다시 물었다.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일이라고 답했다.
그 대답이 오래 남았다. 나도 그 자리에서 조금 받은 것 같았다.
그리스 여자분들은 말이 굉장히 느릿느릿하다. 그게 마음에 들었다.
두 시간을 기다리는 데 그 말투가 도움이 됐다.
독일에서 놀러 온 둘

같은 칸에 독일에서 놀러 온 친구 둘이 있었다.
축구 유니폼을 입고 있었고 계속 웃었다.
먼저 내리면서 손을 흔들어줬다. 그 정도까지 할 이유가 없었는데도 그랬다.
뒷자리가 영어를 잘했다

내 뒤에 앉은 사람이 영어를 잘했다.
남자 둘은 군인이고 여자 한 명은 학생이라고 했다. 가는 내내 떠들었다.
앞자리는 커플이었다. 여자 쪽이 나 영어 잘한다면서 기초 영어를 하는 게 웃겼다.
이야기가 한참 오간 뒤에야 알았다. 이 기차가 열네 시간짜리라는 걸.
표를 살 때 아무도 그 말을 안 해줬다. 나도 안 물어봤다.
중간에 계속 선다

야간열차는 중간에 계속 섰다.
드라마(Δράμα)라는 이름의 역에도 섰다. 도시 이름이 그냥 드라마다.
선 김에 다들 내려서 담배를 피우거나 뭘 사 왔다.

누가 뭘 사 오면 나눠 먹었다.
기차 안에서 몇 시간을 같이 있으면 그렇게 된다.

밤이 깊어지면서 서는 역마다 사람이 줄었다.
나중에는 칸에 몇 명 안 남았다.
새벽에 진짜 도착했다
밤새 달린 기차가 다음 날 새벽에 아테네에 닿았다.

하늘에 달이 아직 떠 있었다.
플랫폼 표지판에 ΑΘΗΝΑ라고 적힌 걸 보고서야 끝났다는 게 실감이 났다.
열네 시간이었다. 진짜 열네 시간.
알렉산드로폴리스-아테네 야간열차
노선은 지금도 있다. 알렉산드로폴리스와 아테네를 잇는 야간열차가 그대로 운행 중이다. 편도 소요시간은 13시간 40분 안팎으로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시간표는 헬레닉 트레인(옛 OSE)이 공개한 네트워크 시간표에, 예약과 요금은 헬레닉 트레인 공식 사이트에 있다.
정시 출발을 전제로 일정을 짜지 않는다. 나는 표에 찍힌 시각보다 두 시간 넘게 늦게 탔다. 도착 당일에 다른 예약을 붙여두면 곤란해진다.
야간 구간은 먹을 걸 미리 산다. 중간역에서 내려 사 오는 사람이 많지만 정차 시간이 짧다. 역 앞 가게가 다 열려 있는 것도 아니다.
같은 칸 사람과 말을 튼다. 열네 시간이라 어차피 시간이 남는다. 나는 여기서 그날 제일 좋은 대화를 했다.
버스로 국경, 밤기차로 종단
버스로 국경을 넘고 바다에 들어갔다가 밤기차로 나라를 종단한 하루였다.
이동만 한 날인데 이상하게 알맹이가 있었다.
기차가 두 시간 늦은 덕에 소셜워커와 이야기를 했고, 열네 시간이라 뒷자리와 친해졌다.
빨랐으면 아무것도 안 남았을 하루다.
새벽에 아테네에 내렸다.
첫날은 꼬치에 꿴 돼지고기 한 접시를 먹고 아크로폴리스 아래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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