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 파로 1] 포르투갈 남쪽 끝 파로, 목적지가 아니었던 도시로 가는 기차

파로 여행기 · 1편
파로는 목적지가 아니었다.
91유로짜리 비행기가 거기서 떴다.
그런데 그 기차에서 만난 두 분과
지금도 연락한다.

포르투갈 남쪽 끝에 파로라는 도시가 있다. 알가르브 해안의 관문이고 유럽 사람들이 여름에 몰려가는 곳이다.

나는 거기 해변을 보러 간 게 아니다. 그 도시에 있는 공항에서 비행기가 떠서 갔다.

91유로짜리 비행기 때문이었다

순서가 좀 이상했다. 스완지시티 경기표를 먼저 샀다. 37.5유로짜리 구석자리였다. 그러고 나서 영국으로 넘어갈 비행기를 찾았는데, 리스본에서 뜨는 것보다 파로에서 뜨는 게 훨씬 쌌다. 91유로.

문제는 그게 당일치기라는 것이었다. 비행기가 연착되거나 버스를 하나만 놓쳐도 경기를 못 본다. 표를 사놓고도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일정이 이렇게 됐다. 리스본에서 남쪽 끝까지 기차로 내려가고, 거기서 비행기를 타고 영국으로 간다. 파로는 그 사이에 끼어 있는 도시다.

가고 싶어서 가는 게 아니라 비행기가 거기서 떠서 가는 도시. 배낭여행을 오래 하면 이런 도시가 생긴다.

마지막 아침은 조식이었다

호스텔 유리문에 손으로 쓴 메모와 전단이 여러 장 붙어 있다
손님들이 두고 간 지폐와 엽서가 진열장 유리에 붙어 있었다.

리스본에서 마지막 아침을 먹었다. 하루를 더 묵으려고 옮긴 그 호스텔이다.

조식이 무제한이었고 맛이 있었다. 그런데 사진이 한 장도 없다. 먹느라 정신을 놓고 있다가 접시를 비우고 나서야 생각났다.

밥 사진을 안 찍은 게 그날의 유일한 후회였다면 나쁜 아침은 아니었다.

같은 방을 쓰던 친구들과는 말이 잘 안 통했다. 브라질에서 온 친구와는 정치 이야기를 했고, 중국에서 온 친구와는 번역기를 돌려가며 수다를 떨었다. 화면에 문장을 넣고 돌려서 보여주고, 상대가 다시 넣고 돌려서 보여주고.

실내에서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웃으며 찍은 셀카
말은 잘 안 통했는데 번역기를 돌려가며 두 시간을 앉아 있었다.

말이 안 통해서 답답한 순간도 있었는데, 답답한 채로 두 시간쯤 앉아 있는 것도 여행에서만 되는 일이다. 한국에서라면 그냥 자리를 떴을 것이다.

액정이 깨진 폰으로 길을 찾았다

액정이 깨진 스마트폰 화면에 지도와 경로가 떠 있다
이 상태로 두 달을 더 썼다. 화면이 보이기는 했다.

폰 액정이 깨져 있었다. 언제 깨졌는지는 기억에 없는데, 유럽을 두 달 돌면서 어딘가에서 떨어뜨렸을 것이다. 금이 화면 전체에 거미줄처럼 가 있었고 그 위로 지도가 떴다.

그 상태로 두 달을 더 썼다. 여행 중에 폰을 고치는 건 시간과 돈이 다 드는 일이고, 화면이 보이기는 했다.

화면에 네 시간이라고 떠 있었다. 코메르시우 광장에서 출발해서 지하철로 엔트르캄푸스역까지 가고, 거기서 기차를 타면 오후 다섯 시 반쯤 파로에 닿는다는 계산이었다.

폰 화면에 환승 경로와 도착 시각이 단계별로 떠 있다
14시 10분 출발, 17시 32분 파로 도착. 네 시간짜리 계산이었다.

리스본에서 마지막으로 쓴 게 이 카드였다. 주황색 종이 카드에 충전해서 쓰는 방식인데, 며칠 동안 지하철을 탈 때마다 이걸 찍었다.

바이샤 거리, 버스 전용차선이 그려진 도로와 인도
카드를 찍으러 지하철역까지 걸었다. 바닥에 BUS 라고 크게 적혀 있다.

기차에서 먹을 걸 샀다

마트 진열대에 파인애플맛 판타 페트병이 줄지어 있다
파인애플맛 판타. 1.5리터에 1.19유로였다.
종이봉투 없이 손에 든 음료 한 병과 초코칩 쿠키 봉지
산 건 이 둘이다. 이동하는 날의 끼니는 대개 이렇게 손에 드는 것들이 된다.

역으로 가기 전에 마트에 들렀다. 네 시간을 앉아 있어야 하니 마실 것과 먹을 것이 필요했다.

산 건 음료 한 병과 과자였다. 이동하는 날의 끼니는 대개 이렇게 손에 들고 먹는 것들이 된다.

21.20유로

손에 든 기차 승차권, 엔트르캄푸스에서 파로까지 21.20유로가 찍혀 있다
엔트르캄푸스 → 파로, 21.20유로. 572 열차 14시 10분.

표에 출발역과 도착역이 찍혀 있었다. 엔트르캄푸스에서 파로까지. 값은 21.20유로.

이 여행에서 기차를 탄 게 오랜만이었다. 유럽에서는 기차가 버스보다 비싼 경우가 많아서 그동안 웬만하면 버스나 카풀을 탔다. 스페인에서 포르투갈로 넘어온 것도 카풀이었고 포르투에서 리스본으로 온 것도 카풀이었다.

이번에는 기차를 골랐다. 남쪽 끝까지 가는 길이 네 시간이고, 그 시간을 앉아서 가고 싶었다.

매표소는 파란 간판을 달고 있었다. `Bilheteira`. 포르투갈에서 매표소는 다 이 단어다. 성에서도 봤고 역에서도 본다.

역 구내 통로에 4번 승강장을 가리키는 표지가 매달려 있다
표지 위에 비둘기가 앉아 있었다. 4번 승강장으로 가면 됐다.
리스본
🚆
파로
엔트르캄푸스역(또는 오리엔트역)
파로역
소요시간네 시간 안팎
열차CP Intercidades
당시가격21.20유로 · 2등석
현재운항지금도 하루 여러 편
현재가격온라인 예매가 현장 구매보다 싸다
좌석지정제 · 창가마다 커튼과 접이식 테이블
다른수단버스가 조금 싸고 비행기도 있다

리스본에서 알가르브로 내려가는 길은 기차·버스·비행기가 다 있다. 기차가 제일 편하고 버스가 조금 싸다.

미리 예매하면 할인 요금이 나온다. 성수기에는 자리가 금방 차니 당일에 가면 서서 갈 수도 있다. 도착역 이름이 여럿이라 헷갈리는데, 파로 시내로 가려면 종착역인 파로역에서 내리면 된다.

기차역에서 두 분을 만났다

승강장에서 나이 지긋한 부부와 나란히 붙어 찍은 셀카
남아프리카에서 오셨다고 했다. 사진은 두 분이 먼저 찍자고 하셨다.

승강장에서 기차를 기다리다가 두 분과 이야기를 하게 됐다. 나이가 지긋한 부부였고 영어를 썼다.

어디서 왔냐고 물었더니 남아프리카라고 했다. 나는 그게 나라 이름인 줄 몰랐다. 아프리카 남쪽이라는 뜻인 줄 알고 그래서 어느 나라냐고 다시 물었다. 두 분이 웃으면서 다시 설명해줬는데도 못 알아듣고 또 물었다.

지금 생각하면 민망한데, 그렇게 집요하게 캐물은 덕분에 케이프타운 이야기를 들었다. 그 도시가 어떻게 생겼는지, 거기 사는 게 어떤지, 그리고 치안 이야기를 오래 해주셨다. 밤에 어디를 다니면 안 되는지, 차를 세울 때 뭘 조심해야 하는지 같은 것들. 뉴스로만 듣던 이야기를 실제로 사는 사람한테 들으니 결이 달랐다.

연락처를 적어주셨다

영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더니 뭘 하냐고 물으셨다. 게임 개발자라고 했다.

그랬더니 여자분이 아는 사람 중에 게임 쪽 일을 하는 분이 있다고 했다. 캔디크러쉬 그래픽을 맡았던 사람인데 지금 런던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태블릿을 꺼내서 연락처를 입력해 보여주셨다.

기차역에서 삼십 분쯤 이야기한 사람에게 자기 지인을 소개해주는 것이다. 그것도 처음 보는 외국인한테.

헤어지고 나서 그날 남긴 기록에는 두 분 이름 앞에 이렇게 적혀 있다.

Thank you for everything :)

삼십 분 이야기한 사람에게 쓸 말치고는 큰 문장이다. 그런데 그때 나는 이 문장을 나라마다 쓰고 있었다. 갚을 게 없을 때 꺼내는 말이었고, 이 여행에서 스무 번을 넘게 썼다.

영국 신사 같은 분들이었다. 그래서 다음에 갈 나라가 더 기대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게 그날로 끝나지 않았다. 지금도 그중 한 분은 나에게 글을 보내주신다. 읽으면 생각할 게 생기는 글들이다. 기차역 승강장에서 삼십 분 이야기한 인연이 그렇게 이어졌다.

네 시간짜리 객실

기차 안은 생각보다 좋았다. 좌석이 넓고 창가마다 초록 커튼이 달려 있었다. 마주 보는 자리에는 접이식 테이블이 있어서 산 걸 올려놓고 먹을 수 있었다.

출발하자마자 강을 건넜다. 철교 위를 지나는 동안 창밖으로 타구스강이 통째로 보였다. 며칠 동안 걸어 다닌 그 강이다.

기차 객실 마주 보는 자리와 그 사이 노란 접이식 테이블
마주 보는 자리에 테이블이 있었다. 앞자리 사람은 계속 신문을 봤다.

창밖이 점점 말라갔다

강을 건너고 나니 풍경이 바뀌었다. 도시가 끝나고 들판이 시작됐는데, 그 들판이 초록이 아니었다.

흙이 그대로 드러난 마른 땅에 나무가 드문드문 서 있었다. 나무 아래만 동그랗게 그늘이 지고 나머지는 다 노란색이다. 남쪽으로 갈수록 그게 심해졌다.

같은 나라 안에서 이렇게 달라지는 게 신기했다. 포르투는 물안개가 끼고 저녁에 추웠는데, 여기는 창밖만 봐도 더워 보인다.

역 이름이 전부 해변이었다

기차 창 너머 역 건물에 역 이름과 둥근 시계가 걸려 있다
역 이름이 「프라이아 데 콰르테이라」. 여기부터는 죄다 해변이었다.

남쪽에 가까워지자 역 이름이 달라졌다. 알부페이라, 콰르테이라. 이름 앞이나 뒤에 해변이라는 말이 붙는다.

정차할 때마다 사람이 내렸다. 캐리어를 끌고 내리는 사람, 아이를 데리고 내리는 사람. 이 기차는 리스본 사람들이 여름 휴가를 가는 기차이기도 했다.

역 건물에 둥근 시계가 걸려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데 유럽 시골 역은 아직도 이런 시계를 쓴다.

파로역은 작았다

텅 빈 승강장과 여러 갈래로 놓인 선로 뒤로 흰 역사가 서 있다
알가르브의 관문이라는데 그냥 조용한 지방 역이었다.

파로에 내렸다. 종착역인데 승강장이 낮고 짧았다. 선로가 여러 갈래로 깔려 있고 그 뒤에 흰 역사가 하나 서 있다. 그게 전부였다.

바다는 안 보였다. 알가르브의 관문이라고 해서 뭔가 있을 줄 알았는데 그냥 조용한 지방 역이다.

내린 사람은 많지 않았다. 배낭을 크게 멘 사람이 몇 있었고 나도 그중 하나였다.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승강장을 따라 걸어가고 큰 배낭을 멘 사람이 섞여 있다
내린 사람은 많지 않았다. 배낭을 크게 멘 사람이 몇 있었다.

그날 쓴 돈이 영수증으로 남았다

손에 든 마트 영수증에 품목 몇 줄과 합계 금액이 찍혀 있다
네 줄에 3.18유로. 그날 저녁이 이게 전부였다.

역 근처 마트에서 저녁거리를 샀다. 껌, 쿠키, 음료, 소시지. 합계 3.18유로.

밤을 공항에서 보내야 하니 미리 사둔 것이다. 공항 안에서 사면 값이 두 배가 된다.

버스표에는 시각까지 찍혀 있었다. 버스터미널에서 파로 해변 방향으로 가는 버스다. 요금 2.22유로, 시각은 저녁 여섯 시 이십삼 분. 공항이 그 노선 중간에 있다.

버스 안에서 손에 든 승차권에 요금과 구간과 날짜 시각이 찍혀 있다
터미널에서 파로 해변행 2.22유로. 공항이 그 노선 중간에 있다.
파로 공항
Aeroporto de Faro (FAO)
지금도 알가르브 여행의 출입구다. 시내와 해변을 잇는 버스가 공항을 지난다
가격
시내에서 버스로 방문 당시 2.22유로
주소
8006-901 Faro
알가르브 지역의 관문 공항. 유럽 저가항공이 여름에 집중적으로 들어온다

그날 이동에 쓴 돈을 다 더하면 스물일곱 유로가 조금 안 된다. 기차 21.20, 버스 2.22, 저녁 3.18. 도시 하나를 통째로 건너뛰고 나라 반대편 끝까지 가는 데 그만큼이 들었다.

시내 버스터미널에서 파로 해변 방향 버스를 타면 공항을 지난다. 십오 분 남짓 걸린다.

택시도 있는데 거리가 짧아 요금 부담이 크지 않다. 다만 새벽 비행기면 버스가 끊긴다. 나는 전날 밤에 미리 가서 기다렸다.

공항에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

공항 대합실 벽에 지역 풍경 그림이 걸려 있고 옆에 자판기가 늘어서 있다
벽에 이 지역 해변과 절벽을 그린 천이 걸려 있었다. 정작 그 해변에는 안 갔다.
파로 공항 야간 대기
Faro Airport overnight
공항마다 야간 개방 정책이 다르다. 나는 대합실에서 밤을 났다
가격
무료
주소
출발층 대합실
의자에 팔걸이가 칸마다 있어 눕기 어렵다. 자판기와 화장실은 밤에도 쓸 수 있다

비행기는 다음 날 새벽이었다. 파로에 숙소를 잡을 수도 있었는데 안 잡았다. 몇 시간 자자고 방값을 내는 게 아깝기도 했고, 새벽 비행기에 늦는 게 더 무서웠다.

대합실 벽에 이 지역 풍경을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다. 해변과 절벽과 배. 정작 그 해변에는 안 가고 그림만 보고 있었다.

의자는 팔걸이가 칸마다 박혀 있었다. 누울 수 없게 만들어놓은 것이다. 공항 노숙을 여러 번 해보면 이 팔걸이가 있는지 없는지가 그날 밤을 결정한다는 걸 알게 된다.

공항 대합실에 금속 의자가 길게 줄지어 비어 있다
팔걸이가 칸마다 박혀 있다. 이게 있는지 없는지가 그날 밤을 결정한다.

그날 밤 이야기는 다음 편이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가 영국이다.

먹을 것은 시내에서 미리 사 오는 게 낫다. 공항 안은 값이 두 배쯤 된다.

바닥에서 자려면 얇은 매트나 침낭이 있어야 한다. 여름이어도 새벽에는 냉방 때문에 춥다. 배낭을 베개로 쓰고 끈을 몸에 걸어두는 게 기본이다.

이동만 한 하루

명소는 하나도 안 봤다. 종일 이동만 했다.

그런데 이 구간에서 제일 오래 남은 게 그날이다. 성이나 기념비는 사진을 봐야 기억나는데, 승강장에서 두 분과 이야기한 삼십 분은 지금도 그대로 떠오른다.

목적지가 아니었던 도시로 가는 길에서 오래 가는 인연이 생겼다. 여행에서 뭐가 남을지 미리 알 수 없다는 말을 여러 번 했는데, 이날이 그 말의 제일 분명한 사례다.

그리고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 91유로짜리 비행기를 타고 가서, 정작 보러 간 경기는 못 보게 된다는 것을.

다음 편부터 영국이다. 공항 노숙으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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