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 헬싱키 2] 눈이 마주쳐도 아무도 인사하지 않았다
소리가 안 났다.
아무도 인사하지 않았다.
바로 앞 구간이 웨일즈였다. 거기서는 사흘 동안 가는 집마다 인사할 사람이 있었다.
여기는 반대였다.
조식을 따로 샀다

숙소에서 조식을 파는데 값을 따로 받는다. 한국인 후기에 괜찮다는 말이 있어서 샀다.
스테인리스 트레이가 줄지어 놓인 뷔페였다. 케첩과 주스가 통째로 나와 있고 각자 접시에 담아 간다.
계란프라이가 트레이째 놓여 있었다. 부친 걸 쌓아둔 게 아니라 한 장씩 나란히 깔아뒀다.

접시에 담아 왔다. 계란프라이 두 장, 소시지, 잼을 바른 호밀빵.

이 계란프라이가 그날 제일 좋았다. 노른자가 반만 익어 있고 흰자 가장자리가 딱 붙을 만큼만 지져져 있었다.
값이 붙은 조식을 산 게 이 여행에서 몇 번 안 된다. 대개는 마트에서 사서 방에서 먹었다. 그런데 이 나라는 마트 물가도 만만치 않아서, 그럴 바에는 조식을 사는 쪽이 나았다.
지도를 한 장 받아 나왔다

프런트에 종이 지도가 쌓여 있었다. 한 장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이 도시에서는 그걸로 충분했다. 도심이 작아서 접힌 지도 한 면에 다 들어간다.
숙소를 나서자마자 공원이었다.

문을 열고 나오면 잔디와 나무다. 도심 한복판인데 그렇다.
길이 곧고 넓었다. 가로수가 양쪽으로 늘어서고 그 사이로 자전거가 지나간다.

잔디밭에 바위가 그냥 있었다

걷다 보니 잔디밭 가운데 커다란 바위가 통째로 드러나 있었다.
치우거나 덮지 않았다. 공원을 만들면서 바위를 피해 잔디를 깐 것이다.
이 나라 땅은 화강암 위에 얇게 흙이 덮인 구조다. 조금만 파도 바위가 나온다. 그래서 도시를 지을 때 바위를 없애는 대신 그 사이에 집을 넣는다.
만을 따라 계속 걸었다. 물이 도심 안쪽까지 들어와 있어서 걷다 보면 계속 물이 나온다.

잔디에 박힌 이름표

풀밭에 낮은 돌 명판이 하나 놓여 있었다.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URHO KEKKONEN`.
이 나라 대통령을 스물다섯 해 넘게 지낸 사람이다. 냉전 동안 소련과 서방 사이에서 이 나라를 중립으로 끌고 간 인물이라, 여기서는 평가가 갈리면서도 이름은 어디에나 있다.
명판이 크지 않았다. 동상도 없고 울타리도 없다. 잔디에 그냥 놓여 있어서 모르고 밟을 수도 있다.
그 옆에 안내판이 서 있었다. 홀 이름이 두 언어로 나란히 적혀 있었다. 이 나라는 핀란드어와 스웨덴어를 같이 쓴다.
흰 건물이 물가에 서 있었다

물가에 흰 대리석 건물이 하나 있었다. 낮고 옆으로 길다.
이 나라 대표 건축가가 지은 공연장이다. 여기서 국제 회의가 여러 번 열렸고, 그중 하나가 냉전기 유럽 안보 회의였다.
바깥에서만 봤다. 이 여행에서 입장료를 받는 곳은 안 들어가는 게 습관이 돼 있었다.
조금 더 가니 또 다른 흰 건물이 나왔다. 이번엔 오페라 극장이다.
길 하나에 시대가 겹쳐 있었다

같은 길에서 석조 건물이 나왔다. 뾰족한 탑이 솟아 있고 벽이 거칠게 다듬어져 있다.
국립박물관이다. 이 나라가 러시아 제국에서 독립하기 전에 지은 건물이고, 자기들 뿌리를 건축으로 주장하던 시기의 양식이다.
벽 위쪽에 짐승이 조각돼 있었다. 곰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 맞은편이 유리 건물이었다. 곡면으로 휜 금속과 유리로 지은 현대미술관이다.

돌로 지은 백 년 전 건물과 유리로 지은 현대 건물이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본다. 이 도시는 그걸 어색해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앉아 있는 동상이 있었다

공원 한쪽 바위 언덕 앞에 청동 인물상이 있었다. 서 있는 게 아니라 앉아 있다.
이 나라 동상은 대체로 크지 않다. 사람 키보다 조금 큰 정도이고 받침도 낮다.
옆에 서서 한 장 찍었다. 이 여행에서 동상을 보면 찍는 게 버릇이 돼 있었다.

큰길에도 사람이 없었다

넓은 도로가 나왔다. 전차선이 하늘에 얽혀 있고 차선이 여러 개다.
그런데 차가 드문드문 지나간다. 신호가 바뀌어도 건너는 사람이 몇 없다.
여기가 이상했다.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있는데 조용한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은 분명 있다. 그런데 말소리가 안 들린다. 발소리도 크지 않다. 서로 부딪히지 않게 미리 비켜서 걷는다.
그리고 눈이 마주쳐도 아무도 인사하지 않는다.
며칠 전까지 있던 웨일즈에서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모르는 사람이 고개를 들어 인사했다. 펍에서는 옆자리가 말을 걸었다. 여기서는 그게 한 번도 없었다.
처음엔 불친절한가 싶었다. 그런데 며칠 지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말을 안 거는 게 무관심이 아니라, 상대의 시간을 안 뺏는 쪽으로 굳은 예의에 가까웠다. 정작 길을 물어보면 하던 걸 멈추고 끝까지 알려줬다.
번화가에 도착했다

한 시간 넘게 걸으니 사람이 모이는 구역이 나왔다.
버스가 여러 노선 모이는 곳이고 쇼핑센터가 붙어 있다. 이 도시에서 제일 붐비는 자리다.
천막이 줄지어 서 있었다. 무슨 행사가 있었는지 광장에 흰 천막이 늘어서 있었다.

좌판에 나무로 깎은 동물이 놓여 있었다. 손바닥만 한 것들인데 결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숲이 국토의 대부분인 나라라 나무를 다루는 손이 흔하다. 기념품 가게에도 나무 물건이 제일 많았다.
광장 한가운데 나무가 얽혀 있었다

광장 가운데에 커다란 목조 구조물이 서 있었다.
가지처럼 갈라진 나무 기둥을 엮어 아치처럼 만든 것이다. 건물도 아니고 조각도 아닌데 사람들이 그 아래로 지나다녔다.
아래로 들어가 올려다봤다. 나무 사이로 하늘이 조각조각 보였다.

헬싱키 도심 걷기
도심이 작아서 걸어서 다 된다. 중앙역에서 이 홀까지 이십 분, 그 길에 박물관과 미술관과 공원이 다 걸린다.
교통카드를 안 사도 하루는 버틴다. 다만 근교로 나가면 버스가 필요하다.
여름에는 해가 아주 늦게까지 있다. 저녁 아홉 시에도 밝아서 시간 감각이 흐려진다. 대신 그늘에 들어가면 갑자기 서늘하다. 겉옷을 하나 들고 다니는 게 낫다.
이 도시가 조용한 이유
인구 밀도가 낮다. 나라 전체 인구가 서울보다 적고 그 인구가 넓은 땅에 흩어져 있다.
그리고 말수 자체가 적다. 이 나라에는 침묵을 어색해하지 않는 문화가 있어서, 대화 중간에 말이 끊겨도 아무도 급하게 메우지 않는다.
낯선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도 드물다. 버스에서 옆자리가 비어 있으면 그 자리부터 채우고, 다 차야 옆에 앉는다.
다만 물어보면 다르다. 길을 묻거나 도움을 청하면 그때부터는 확실히 도와준다. 먼저 안 걸 뿐이지 닫혀 있는 게 아니다.
제일 먼저 적어둔 건 조용하다는 것
이 도시에서 제일 먼저 적어둔 게 조용하다는 것이었다.
바로 앞 구간이 웨일즈였기 때문에 더 그랬다. 거기서는 사흘 내내 누군가 말을 걸었고 여기서는 하루 종일 아무도 안 걸었다.
둘 중에 뭐가 낫냐고 하면 답이 안 나온다. 웨일즈에서는 사람 때문에 여행이 통째로 바뀌었고, 여기서는 사람이 없어서 머리가 비었다.
두 달 넘게 사람을 만나고 다닌 참이었다. 그 상태로 이 도시에 오니 조용한 게 불편한 게 아니라 쉬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음 편도 같은 날이다. 마트에서 밥이 든 빵을 하나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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