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 콜롬보 4] 공항에서 보낸 마지막 밤, 홍차 한 잔과 다음 나라를 검색하던 시간
열두 시간이 남아 있었다.
어떻게 버티느냐가 전부였다.
앞 편 마지막 문장 그대로, 그 밤 이야기다.
폰으로 새 항공권을 끊은 게 오후였다.
새벽 flydubai 편까지는 아직 열두 시간 넘게 남아 있었다.
아침부터 정신없이 뛰어다닌 하루 끝에 할 일은 하나였다.
이 시간을 어떻게 버티느냐.
밤이 되니 앉아 있는 사람이 늘었다.
비행기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고, 나처럼 갈 데가 없어서 남은 사람도 있었다.

남은 루피로 마지막 식사
시간도 돈도 남았으니, 공항 2층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았다.
사모사와 커틀릿, 볶음밥에 커리, 콜라 한 병까지 한 상 가득 시켰다.
어차피 다 쓰고 갈 루피였다.

디저트로 처음 보는 현지 요거트도 하나 집었다.
"Nes Lite Set Yoghurt"라고 적힌 자그마한 플라스틱 컵이었다.
냉장고에서 막 꺼냈는지 겉면에 물기가 맺혀 있었다.

접시를 다 치우고 나니 테이블 위엔 그 컵 하나만 남았다.
자그마한 컵에 담긴 요거트를 마지막 디저트 삼아 비웠다.

뚜껑을 열어보니 표면이 매끈하게 굳어 있었다.
떠먹는 요거트라기보다 푸딩에 가까운 질감이었고, 단맛은 거의 없었다.
그 심심한 맛이 오히려 그날 밤에는 맞았다.

커피빈 홍차와 『왕좌의 게임』
긴 밤을 때울 때 누군가는 의자에 기대 잠을 청할 것이다.
나는 커피빈에 자리를 잡고 책을 펼쳤다.
홍차 티백을 우린 잔 옆에 놓은 건 며칠 전 서점에서 산 『A Storm of Swords』였다.
영어 원서라 진도는 더뎠지만, 갈 곳 없는 밤엔 오히려 페이지를 넘기기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잔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티백 실이 손잡이에 걸쳐져 있었다.
같은 잔을 각도만 바꿔 두 번 찍었다.
그때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었다.

홍차 한 모금에 정신이 좀 들었다.
여행기엔 좋은 이야기만 적어왔지만, 힘들 때는 다 버리고 집에 가고 싶은 순간도 적지 않았다.
그래도 그 순간 떠오른 생각은 하나였다.
미리사 해변과 그 숙소는 정말 다시 가고 싶을 만큼 좋았다.
두바이를 미리 훔쳐보다
홍차를 반쯤 비웠을 때 아이패드를 꺼내 다음 나라를 검색했다.
페낭에서 KLIA로 넘어오던 밤에도 똑같았다.
그때도 침대에 누운 채 다음 행선지를 하루 전날에야 찾아봤다.
이번엔 침대도 없이 공항 의자에서, 그것도 계획한 날보다 하루 늦게 같은 걸 하고 있었다.

"Bedspace Next To Burj Khalifa"라는 매물이 눈에 들어왔다.
부르즈 할리파 도보 10분, 지하철역 도보 2분, 남성 전용 도미토리였다.
홍콩까지는 며칠 치 일정을 미리 짜서 움직였다.
이 여행에서 J는 이미 오래전에 P가 됐다.
그날은 그 P가 한 번 더 확인된 밤이었다.
새벽에 만난 친구
밤이 깊어질수록 대합실은 오히려 사람이 늘었다.
비슷한 시간대 비행기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그 틈에서 옆자리 여성과 눈이 마주쳤고, 몇 마디를 주고받다 이야기가 술술 풀렸다.
그날은 북유럽 어디쯤이겠거니 짐작만 했다.
국적을 끝내 못 물어봤기 때문인데, 나중에 알고 보니 체코 사람이었다.
얼굴을 보면 성인이 분명한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고등학생인가 싶을 만큼 앳된 구석이 있었다.
헤어지기 전에 SNS로 서로 친구를 추가했다.

그 친구 추가는 그날로 끝나지 않았다.
며칠 뒤 두바이에 도착했을 때 먼저 메시지가 왔다.
두바이는 어떠냐고. 같이 찍은 사진에 내가 한국어로 달아둔 말이 대체 무슨 뜻이냐고도 물었다.
그러다 자기가 다니는 학교 전공이 영 안 맞아서 바꿀까 고민 중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나는 전공을 바꿔본 적이 있다고 했다.
경제학으로 시작했다가 게임 쪽으로 옮겼다고. 너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새벽 공항에서 몇 시간 떠든 사이에 할 말은 아닌 것 같았는데, 그때는 그냥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지금도 그 친구는 내 친구 목록에 있다.
가끔 올라오는 사진을 보면 결혼해서 잘 사는 모양이다.
그날 밤 이야기가 무슨 대단한 인연으로 이어진 건 아니다.
다만 목록 어딘가에 남아서, 가끔 이렇게 그날을 떠올리게 한다.
비행기를 놓치고 전화비까지 물어낸 하루였는데, 그 끝은 결국 또 사람이었다.
쿠알라룸푸르에서도, 페낭에서도 그랬다.
낯선 사람 옆에 앉으면 일단 말을 걸어보는 버릇이 이번 여행 내내 이어지고 있었다.
힘든 밤에도 그 버릇은 그대로였다.
이 여행을 시작할 때는 몰랐던 나 자신이었다.
창밖이 밝아지고 있었다.
그렇게 밤이 끝났다.

공항에서 밤을 새운다면
비행기를 놓쳐서든 환승 시간이 길어서든, 이 공항에서 밤을 통째로 보내야 하는 상황은 생각보다 자주 생긴다.
터미널에 들어가는 것부터 쉽지 않다.
반다라나이케 국제공항은 입구에서 여권과 항공권을 확인한다.
배웅 나온 사람은 안으로 못 들어가고, 표가 있어도 시간이 너무 이르면 실랑이가 생길 수 있다.
체크인 카운터는 보통 출발 3~4시간 전에 열린다.
그러니까 열두 시간이 남았다면 그중 절반 이상은 출국심사 전 구역에서 보내게 된다.
이 구역에는 식당과 카페, 환전소가 있고 의자도 있다. 대신 조명이 밝고 사람이 계속 드나든다.

출국심사를 통과한 뒤가 오히려 밤을 보내기 낫다.
출발 게이트 쪽은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좌석도 많은데, 게이트 5~8번 근처에는 팔걸이 없는 의자가 있어서 누울 수 있다.
돈을 쓸 생각이 있다면 방법이 있다.
- 트랜짓 호텔 — 공항 안에 있는 유일한 숙소다. 도착·출발층 위 2층, 입국심사 카운터 근처에 있어 환승객은 밖으로 나가지 않고 들어갈 수 있다. 6시간 단위로 방을 판다.
- 슬리핑 팟 — 환승 구역에 있다. 마사지·차·와이파이를 함께 제공한다.
- 라운지 — 스리랑칸항공 세렌딥 라운지는 상위 등급 승객용이지만, 에어포트 프리미어 라운지는 누구나 돈을 내고 쓸 수 있다. 샤워 시설이 있는 곳도 있어서 밤을 새운 뒤 아침 비행기를 탄다면 값을 한다.
나는 그날 셋 중 어느 것도 쓰지 않았다.
의자와 홍차 한 잔으로 버텼는데, 지금 같은 상황이 다시 온다면 라운지 값은 낼 것 같다.
밤을 새우고 비행기를 타면 다음 도시의 첫날이 날아간다.
나는 다음 날 두바이에서 그걸 겪었다.
미리사·갈레에서 콜롬보공항 가는 법
남부고속도로(Southern Expressway, E01)가 콜롬보에서 마타라까지 이어져 있어서,
콜롬보공항에서 갈레까지는 고속버스나 택시로 1.5~2시간, 미리사까지는 2.5~3.5시간 정도 잡으면 된다.
다만 공항에서 갈레·미리사 방면으로 바로 가는 대중버스나 기차는 없고,
콜롬보 시내를 거쳐야 하는 구조라 공항↔해안 구간은 택시나 프라이빗 카가 훨씬 수월하다.
시내버스라면 반드시 고속버스(Expressway bus)인지 확인해야 한다.
일반버스는 정류장마다 서기 때문에 같은 구간도 배 이상 걸릴 수 있다.
체크인·출국 여유시간
반다라나이케 국제공항(BIA)은 국제선 기준 출발 3시간 전 도착을 권장하고,
성수기(오전 5~8시, 오후 4~7시)엔 3시간 30분 전이 안전하다.
체크인·수하물 카운터는 보통 출발 1시간~1시간 30분 전에 닫힌다.
나는 해안 도시에서 출발할 때 이동시간에 이 여유분까지 더해 최소 5~6시간 전에 숙소를 나선다.
flydubai를 포함한 여러 항공사는 출발 30일 이내로 미리 변경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위약금 없이 운임 차액만 내고 재예약된다.
다만 그건 미리 바꿨을 때 이야기다.
나처럼 탑승 시각을 넘겨버린 노쇼는 대부분 새 항공권을 다시 산다.
ETA·환전 최신정보
한국 국적자는 최근부터 스리랑카가 무료 ETA 대상국 40개국에 포함되면서,
30일 체류에 한해 ETA 발급 비용이 면제됐다.
다만 발급 자체는 여전히 필수라 출국 전 공식 ETA 사이트에서 미리 신청해야 하고, 공항 즉석 발급은 안 된다.
환전 감각도 달라졌다.
그때는 100달러가 1만 3천 루피 정도였는데, 최근 기준으로는 1달러에 300루피 안팎이다.
그날 새 항공권으로 나간 LKR 12,566.58은 그때 환율로 약 10만 4천원,
지금도 여전히 부담스러운 금액이다.
남은 루피를 어떻게 할지도 미리 정해두는 게 좋다.
스리랑카는 자국 통화 반출을 2만 루피까지만 허용한다.
그 이상이면 공항에서 남은 돈을 쓰거나 외화로 바꿔야 한다.
문제는 공항 환전소가 시내보다 환율이 나쁘고, 소액은 수수료를 떼면 남는 게 별로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처럼 마지막 날 밥값·찻값으로 털어버리는 쪽이 대개 손해가 적다.
반대로 외화는 미화 1만 달러 상당까지 신고 없이 들고 나갈 수 있고, 들어올 때는 1만 5천 달러가 신고 기준이다.
동전은 어디서도 안 바꿔주니 마지막 날 물이나 과자로 정리하는 게 낫다.
다녀와서
말레이시아 KLIA에서도 한 번 밤을 새운 적이 있다.
그건 계획된 노숙이었다.
다음 비행기까지 시간이 남아 일부러 공항에서 자기로 한 밤이었다. 이번엔 달랐다.
계획에 없던 밤이 통째로 남았고, 그 안에서 밥을 먹고 책을 읽고 다음 나라를 찾아보고 낯선 사람과 친구가 됐다.
그때는 그 밤이 가혹하게만 느껴졌는데, 지나고 보니 이런 밤도 여행의 일부였다.
스리랑카에서 보낸 닷새 중에 제일 또렷하게 남은 게 이 밤이다.
미리사 해변도 갈레 성벽도 좋았는데 이상하게 그렇다.
스리랑카는 다시 가고 싶은 나라다.
다음에 간다면 출국 날짜는 두 번 확인하겠다.
마지막 밤도 공항 말고 바다 근처에서 보내고 싶다.
그래도 아침은 왔고 비행기는 떴다.
다음 편은 새벽 비행기로 넘어간 두바이, 경유지에서 마주한 낯선 도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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