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 콜롬보 4] 공항에서 보낸 마지막 밤, 홍차 한 잔과 다음 나라를 검색하던 시간

콜롬보 여행기 · 4편
새 항공권까지
열두 시간이 남아 있었다.
공항에서 그 밤을
어떻게 버티느냐가 전부였다.

앞 편 마지막 문장 그대로, 그 밤 이야기다.

폰으로 새 항공권을 끊은 게 오후였다.

새벽 flydubai 편까지는 아직 열두 시간 넘게 남아 있었다.

아침부터 정신없이 뛰어다닌 하루 끝에 할 일은 하나였다.

이 시간을 어떻게 버티느냐.

밤이 되니 앉아 있는 사람이 늘었다.

비행기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고, 나처럼 갈 데가 없어서 남은 사람도 있었다.

해가 지는 반다라나이케 국제공항 계류장
해가 지는 공항 계류장 (사진: Wikimedia Commons / Imaas181, CC BY-SA 4.0)

남은 루피로 마지막 식사

시간도 돈도 남았으니, 공항 2층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았다.

사모사와 커틀릿, 볶음밥에 커리, 콜라 한 병까지 한 상 가득 시켰다.

어차피 다 쓰고 갈 루피였다.

공항 2층 레스토랑에서 시킨 스리랑카식 한 상
공항 2층 레스토랑 — 사모사·커틀릿·볶음밥 한 상
반다라나이케 국제공항
Bandaranaike International Airport (CMB)
스리랑카의 관문 공항으로 지금도 같다
영업
24시간
주소
Katunayake 11450, Sri Lanka
콜롬보 시내에서 30km쯤 떨어져 있어 차로 40분에서 한 시간 남짓 걸린다. 출국장 2층에 앉아 시간을 보낼 만한 식당이 있다. 체크인 카운터는 출발 세 시간 전에 열린다

디저트로 처음 보는 현지 요거트도 하나 집었다.

"Nes Lite Set Yoghurt"라고 적힌 자그마한 플라스틱 컵이었다.

냉장고에서 막 꺼냈는지 겉면에 물기가 맺혀 있었다.

뚜껑을 열기 전의 현지 요거트 컵, 겉면에 물기가 맺혀 있다
겉에 물기가 맺혀 있었다

접시를 다 치우고 나니 테이블 위엔 그 컵 하나만 남았다.

자그마한 컵에 담긴 요거트를 마지막 디저트 삼아 비웠다.

처음 먹어본 스리랑카 요거트
공항 디저트 — 처음 먹어본 현지 요거트

뚜껑을 열어보니 표면이 매끈하게 굳어 있었다.

떠먹는 요거트라기보다 푸딩에 가까운 질감이었고, 단맛은 거의 없었다.

그 심심한 맛이 오히려 그날 밤에는 맞았다.

뚜껑을 열고 한 스푼 뜬 요거트, 푸딩처럼 매끈하게 굳어 있다
푸딩처럼 굳어 있다

커피빈 홍차와 『왕좌의 게임』

긴 밤을 때울 때 누군가는 의자에 기대 잠을 청할 것이다.

나는 커피빈에 자리를 잡고 책을 펼쳤다.

홍차 티백을 우린 잔 옆에 놓은 건 며칠 전 서점에서 산 『A Storm of Swords』였다.

영어 원서라 진도는 더뎠지만, 갈 곳 없는 밤엔 오히려 페이지를 넘기기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커피빈 홍차 한 잔과 나란히 놓인 『A Storm of Swords』
홍차 한 잔으로 버텼다

잔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티백 실이 손잡이에 걸쳐져 있었다.

같은 잔을 각도만 바꿔 두 번 찍었다.

그때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었다.

위에서 내려다본 커피빈 홍차 잔, 티백 실이 손잡이에 걸쳐져 있다
티백 실이 손잡이에 걸쳐져 있다

홍차 한 모금에 정신이 좀 들었다.

여행기엔 좋은 이야기만 적어왔지만, 힘들 때는 다 버리고 집에 가고 싶은 순간도 적지 않았다.

그래도 그 순간 떠오른 생각은 하나였다.

미리사 해변과 그 숙소는 정말 다시 가고 싶을 만큼 좋았다.

두바이를 미리 훔쳐보다

홍차를 반쯤 비웠을 때 아이패드를 꺼내 다음 나라를 검색했다.

페낭에서 KLIA로 넘어오던 밤에도 똑같았다.

그때도 침대에 누운 채 다음 행선지를 하루 전날에야 찾아봤다.

이번엔 침대도 없이 공항 의자에서, 그것도 계획한 날보다 하루 늦게 같은 걸 하고 있었다.

아이패드 화면 속 두바이 에어비앤비 매물 — 부르즈 할리파 근처, 남성 전용 도미토리
여기서 다음 나라를 검색했다

"Bedspace Next To Burj Khalifa"라는 매물이 눈에 들어왔다.

부르즈 할리파 도보 10분, 지하철역 도보 2분, 남성 전용 도미토리였다.

홍콩까지는 며칠 치 일정을 미리 짜서 움직였다.

이 여행에서 J는 이미 오래전에 P가 됐다.

그날은 그 P가 한 번 더 확인된 밤이었다.

새벽에 만난 친구

밤이 깊어질수록 대합실은 오히려 사람이 늘었다.

비슷한 시간대 비행기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그 틈에서 옆자리 여성과 눈이 마주쳤고, 몇 마디를 주고받다 이야기가 술술 풀렸다.

그날은 북유럽 어디쯤이겠거니 짐작만 했다.

국적을 끝내 못 물어봤기 때문인데, 나중에 알고 보니 체코 사람이었다.

얼굴을 보면 성인이 분명한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고등학생인가 싶을 만큼 앳된 구석이 있었다.

헤어지기 전에 SNS로 서로 친구를 추가했다.

새벽 콜롬보공항에서 함께 찍은 사진
새벽 공항에서

그 친구 추가는 그날로 끝나지 않았다.

며칠 뒤 두바이에 도착했을 때 먼저 메시지가 왔다.

두바이는 어떠냐고. 같이 찍은 사진에 내가 한국어로 달아둔 말이 대체 무슨 뜻이냐고도 물었다.

그러다 자기가 다니는 학교 전공이 영 안 맞아서 바꿀까 고민 중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나는 전공을 바꿔본 적이 있다고 했다.

경제학으로 시작했다가 게임 쪽으로 옮겼다고. 너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스리랑카를 떠나기 전 마지막 풍경
떠나기 전에 본 것

새벽 공항에서 몇 시간 떠든 사이에 할 말은 아닌 것 같았는데, 그때는 그냥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지금도 그 친구는 내 친구 목록에 있다.

가끔 올라오는 사진을 보면 결혼해서 잘 사는 모양이다.

그날 밤 이야기가 무슨 대단한 인연으로 이어진 건 아니다.

다만 목록 어딘가에 남아서, 가끔 이렇게 그날을 떠올리게 한다.

비행기를 놓치고 전화비까지 물어낸 하루였는데, 그 끝은 결국 또 사람이었다.

쿠알라룸푸르에서도, 페낭에서도 그랬다.

낯선 사람 옆에 앉으면 일단 말을 걸어보는 버릇이 이번 여행 내내 이어지고 있었다.

힘든 밤에도 그 버릇은 그대로였다.

이 여행을 시작할 때는 몰랐던 나 자신이었다.

창밖이 밝아지고 있었다.

그렇게 밤이 끝났다.

동이 트는 콜롬보 공항 활주로
새벽의 활주로 (사진: Wikimedia Commons / Imaas181, CC BY-SA 4.0)

공항에서 밤을 새운다면

비행기를 놓쳐서든 환승 시간이 길어서든, 이 공항에서 밤을 통째로 보내야 하는 상황은 생각보다 자주 생긴다.

터미널에 들어가는 것부터 쉽지 않다.

반다라나이케 국제공항은 입구에서 여권과 항공권을 확인한다.

배웅 나온 사람은 안으로 못 들어가고, 표가 있어도 시간이 너무 이르면 실랑이가 생길 수 있다.

체크인 카운터는 보통 출발 3~4시간 전에 열린다.

그러니까 열두 시간이 남았다면 그중 절반 이상은 출국심사 전 구역에서 보내게 된다.

이 구역에는 식당과 카페, 환전소가 있고 의자도 있다. 대신 조명이 밝고 사람이 계속 드나든다.

신할라어·타밀어·영어가 나란히 적힌 공항 안내판
공항 안내판은 신할라어·타밀어·영어 세 줄이다 (사진: Wikimedia Commons / Cherubino, CC BY-SA 3.0)

출국심사를 통과한 뒤가 오히려 밤을 보내기 낫다.

출발 게이트 쪽은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좌석도 많은데, 게이트 5~8번 근처에는 팔걸이 없는 의자가 있어서 누울 수 있다.

돈을 쓸 생각이 있다면 방법이 있다.

  • 트랜짓 호텔 — 공항 안에 있는 유일한 숙소다. 도착·출발층 위 2층, 입국심사 카운터 근처에 있어 환승객은 밖으로 나가지 않고 들어갈 수 있다. 6시간 단위로 방을 판다.
  • 슬리핑 팟 — 환승 구역에 있다. 마사지·차·와이파이를 함께 제공한다.
  • 라운지 — 스리랑칸항공 세렌딥 라운지는 상위 등급 승객용이지만, 에어포트 프리미어 라운지는 누구나 돈을 내고 쓸 수 있다. 샤워 시설이 있는 곳도 있어서 밤을 새운 뒤 아침 비행기를 탄다면 값을 한다.

나는 그날 셋 중 어느 것도 쓰지 않았다.

의자와 홍차 한 잔으로 버텼는데, 지금 같은 상황이 다시 온다면 라운지 값은 낼 것 같다.

밤을 새우고 비행기를 타면 다음 도시의 첫날이 날아간다.

나는 다음 날 두바이에서 그걸 겪었다.

미리사·갈레에서 콜롬보공항 가는 법

남부고속도로(Southern Expressway, E01)가 콜롬보에서 마타라까지 이어져 있어서,

콜롬보공항에서 갈레까지는 고속버스나 택시로 1.5~2시간, 미리사까지는 2.5~3.5시간 정도 잡으면 된다.

다만 공항에서 갈레·미리사 방면으로 바로 가는 대중버스나 기차는 없고,

콜롬보 시내를 거쳐야 하는 구조라 공항↔해안 구간은 택시나 프라이빗 카가 훨씬 수월하다.

시내버스라면 반드시 고속버스(Expressway bus)인지 확인해야 한다.

일반버스는 정류장마다 서기 때문에 같은 구간도 배 이상 걸릴 수 있다.

체크인·출국 여유시간

반다라나이케 국제공항(BIA)은 국제선 기준 출발 3시간 전 도착을 권장하고,

성수기(오전 5~8시, 오후 4~7시)엔 3시간 30분 전이 안전하다.

체크인·수하물 카운터는 보통 출발 1시간~1시간 30분 전에 닫힌다.

나는 해안 도시에서 출발할 때 이동시간에 이 여유분까지 더해 최소 5~6시간 전에 숙소를 나선다.

flydubai를 포함한 여러 항공사는 출발 30일 이내로 미리 변경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위약금 없이 운임 차액만 내고 재예약된다.

다만 그건 미리 바꿨을 때 이야기다.

나처럼 탑승 시각을 넘겨버린 노쇼는 대부분 새 항공권을 다시 산다.

ETA·환전 최신정보

한국 국적자는 최근부터 스리랑카가 무료 ETA 대상국 40개국에 포함되면서,

30일 체류에 한해 ETA 발급 비용이 면제됐다.

다만 발급 자체는 여전히 필수라 출국 전 공식 ETA 사이트에서 미리 신청해야 하고, 공항 즉석 발급은 안 된다.

환전 감각도 달라졌다.

그때는 100달러가 1만 3천 루피 정도였는데, 최근 기준으로는 1달러에 300루피 안팎이다.

그날 새 항공권으로 나간 LKR 12,566.58은 그때 환율로 약 10만 4천원,

지금도 여전히 부담스러운 금액이다.

남은 루피를 어떻게 할지도 미리 정해두는 게 좋다.

스리랑카는 자국 통화 반출을 2만 루피까지만 허용한다.

그 이상이면 공항에서 남은 돈을 쓰거나 외화로 바꿔야 한다.

문제는 공항 환전소가 시내보다 환율이 나쁘고, 소액은 수수료를 떼면 남는 게 별로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처럼 마지막 날 밥값·찻값으로 털어버리는 쪽이 대개 손해가 적다.

반대로 외화는 미화 1만 달러 상당까지 신고 없이 들고 나갈 수 있고, 들어올 때는 1만 5천 달러가 신고 기준이다.

동전은 어디서도 안 바꿔주니 마지막 날 물이나 과자로 정리하는 게 낫다.

다녀와서

말레이시아 KLIA에서도 한 번 밤을 새운 적이 있다.

그건 계획된 노숙이었다.

다음 비행기까지 시간이 남아 일부러 공항에서 자기로 한 밤이었다. 이번엔 달랐다.

계획에 없던 밤이 통째로 남았고, 그 안에서 밥을 먹고 책을 읽고 다음 나라를 찾아보고 낯선 사람과 친구가 됐다.

그때는 그 밤이 가혹하게만 느껴졌는데, 지나고 보니 이런 밤도 여행의 일부였다.

스리랑카에서 보낸 닷새 중에 제일 또렷하게 남은 게 이 밤이다.

미리사 해변도 갈레 성벽도 좋았는데 이상하게 그렇다.

스리랑카는 다시 가고 싶은 나라다.

다음에 간다면 출국 날짜는 두 번 확인하겠다.

마지막 밤도 공항 말고 바다 근처에서 보내고 싶다.

그래도 아침은 왔고 비행기는 떴다.

놓친 비행기가 떠난 공항

다음 편은 새벽 비행기로 넘어간 두바이, 경유지에서 마주한 낯선 도시 이야기다.

콜롬보 · 4편 중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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