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 페낭 4] 마지막 날 빅볼라멘, 그리고 쿠알라룸푸르 공항노숙 매뉴얼

페낭 여행기 · 4편
다음 나라를
전날에야 검색하고 있었다.
항공권은 이미 새벽으로 잡혔는데
아는 거라곤 없었다.

말레이시아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아침, 침대에 누운 채로 노트북을 펼쳐 다음 나라를 검색했다.

다음 행선지인 스리랑카 콜롬보 지도를 켜놓고 지명을 하나씩 훑어봤다.

항공권은 이미 다음 날 새벽으로 잡혀 있는데, 정작 그 나라에 대해 아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홍콩까지는 며칠 치 일정을 미리 짜서 움직였는데, 어느새 다음 나라를 전날 밤에야 검색하는 여행자가 되어 있었다.

노트북 화면 속 스리랑카 콜롬보 지도 — 다음 나라를 하루 전에 검색하는 중
노트북 화면 속 스리랑카 콜롬보 지도 — 다음 나라를 하루 전에 검색하는 중

숙소를 나서기 전에는 조지타운 카메라뮤지엄 입구에 들렀다.

사람만 한 곰인형이 빨간 전통 의상에 모자까지 갖춰 쓰고 앉아 있길래,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사진을 한 장 남겼다.

이 도시와의 마지막 인증샷치고는 제법 그럴싸했다.

조지타운 카메라뮤지엄 입구, 곰인형과 남긴 페낭 마지막 사진
조지타운 카메라뮤지엄 입구, 곰인형과 남긴 페낭 마지막 사진

빅볼라멘과 스스로 연주하는 피아노

점심은 전날 만난 친구들이 데려간 My Voice Café & Studio였다.

바얀레파스의 베이 애비뉴에 있는 이 가게는 서양식과 일본풍 라멘을 같이 파는 곳이라,

메뉴판에 치킨찹부터 빅볼라멘까지 나란히 적혀 있었다.

My Voice Café 라멘 메뉴판, 2~5인용 빅볼라멘
My Voice Café 라멘 메뉴판, 2~5인용 빅볼라멘

친구들은 그중에서도 빅볼라멘을 시켰다.

파란 꽃무늬가 그려진 커다란 사기그릇에 뽀얀 국물이 가득 담겨 나왔고, 위에는 다진 고기와 김이 얹혀 있었다.

나무젓가락 말고 국자까지 따로 줘야 할 만큼 그릇이 컸다.

커다란 그릇에 담긴 빅볼라멘을 둘러싼 친구들
커다란 그릇에 담긴 빅볼라멘을 둘러싼 친구들

한쪽에서는 커피가 나왔는데, 잔 위에 토토로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이 작은 라떼 한 잔에도 다들 한참을 들여다봤다.

카페 구석에는 스스로 연주하는 피아노 기계도 놓여 있어서, 밥을 먹는 내내 그 앞을 서성이며 신기해했다.

토토로 얼굴이 그려진 라떼아트
토토로 얼굴이 그려진 라떼아트
마이보이스 카페
My Voice Cafe & Studio
미확인 — 최근 후기를 못 찾았다. 가기 전에 지도앱에서 다시 보는 게 좋다
영업
11:00 - 22:00
가격
빅볼라멘은 2~5인용이라 여럿이 나눠 먹는 값이다
주소
C-5-1, Lorong Bayan Indah 3, Bay Avenue, Bayan Lepas, Penang
전화
+60 4-645 5100
서양식과 일본풍 라멘을 같이 판다. 빅볼라멘이 간판 메뉴라 국자를 따로 준다

공항까지 태워다 주고 돌아간 친구들

밥을 다 먹고 나니 헤어질 시간이었다.

이미 예약해둔 비행기가 있어서 나는 정해진 일정대로 쭉 가야 했다.

헤어질 때는 아쉬웠지만 붙잡을 방법도 없었다.

지금까지도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으로 가끔 소식을 주고받는다.

갚으려고 아껴둔 과자 한 봉지

그날 하루만 세어봐도 아침을 사줬고, 큰 라면을 사줬고, 공항까지 차로 태워다 줬다.

배낭에 아껴둔 게 하나 있었다. 허니버터칩이었다. 떠나기 전에 선물로 받은 것인데, 그때 한국에서는 편의점을 몇 군데 돌아도 못 구하는 과자였다. 여행 중에 크게 신세를 지면 그때 꺼내려고 안 뜯고 들고 다녔다.

봉투에 담아 건넸다. 건네는 순간 알았다. 그냥 감자칩이었다.

받은 것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그날 이렇게 적어뒀다.

요즘은 어떻게든 고마운 일이 생기면 되갚는데 이걸 어떻게 갚아야 하나 막막할 정도로 참 감사했다.

영어가 약해서 그 마음을 다 옮기지는 못했다. 대신 짧게 남겼다.

So thank you again. I never forget everything.

한국어로는 조금 더 길게 적었다.

이 친구들에게 진심으로 좋은 일만 있길, 지금처럼 계속 행복하게 웃으며 잘 지내길 바라고 기도한다.

이 말을 그 뒤로도 계속 썼다. 나라를 옮길 때마다 신세를 진 사람 이름 앞에 같은 문장을 붙였다. 여행이 끝날 때까지 스무 번을 넘겼다. 갚을 방법이 없을 때 남는 건 결국 이 한 줄이었다.

노을 진 하늘 위로, 다시 쿠알라룸푸르

페낭에서 쿠알라룸푸르로 돌아가는 길은 비행기였다.

저녁 6시가 좀 넘어 이륙한 비행기 창밖으로 오렌지빛 노을이 번졌고, 날개 아래로는 도시와 산이 깔려 있었다.

페낭에서 쿠알라룸푸르로 가는 비행기 창밖 노을
페낭에서 쿠알라룸푸르로 가는 비행기 창밖 노을
페낭
쿠알라룸푸르
페낭 국제공항
klia2
소요시간1시간 남짓
현재가격저가항공 편도 3~7만원대
메모저녁 편을 타면 왼쪽 창으로 페낭대교 야경이 내려다보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지자, 바다 위로 다리 하나가 통째로 불빛을 켜고 이어져 있는 게 보였다.

섬과 본토를 잇는 페낭대교로 짐작되는 그 다리를, 하필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야간 조명이 켜진 다리, 비행기 창밖으로
야간 조명이 켜진 다리, 비행기 창밖으로

쿠알라룸푸르에 내려서 신라면을 만나다

공항에 내려 출국장 쪽으로 걸어가는데, 한쪽 벽에 커다란 배너 전시가 눈에 들어왔다.

PRAY FOR SABAH — 그해 6월 사바에서 있었던 지진을 추모하는 전시였다.

산 그림 아래로 방문객들이 남긴 서명이 빼곡했다.

나도 잠깐 발을 멈추고 그 앞을 지나갔다.

PRAY FOR SABAH 추모 전시 — 사바 지진 희생자를 기리며
PRAY FOR SABAH 추모 전시 — 사바 지진 희생자를 기리며

다음 비행기까지 시간이 넉넉하다 못해 남아돌았다.

공항과 이어진 쇼핑몰로 들어가자 한국 마트 코너가 나왔다.

뽀로로 음료와 신라면·진라면 컵라면이 나란히 진열된 걸 보고 반가운 마음에 발걸음을 멈췄다.

컵라면 하나를 집어 계산대로 가져가서 뜨거운 물을 부탁했더니,

점원이 내 얼굴을 슥 보고는 대뜸 한국어로 말을 걸었다.

신라면과 한국 과자를 판매하는 공항 매점
신라면과 한국 과자를 판매하는 공항 매점
"나도 한국인이야. 어떻게 하는지 알아."

스프를 톡톡 털어 넣고 정량까지 딱 맞춰 물을 부어주는 손길이 능숙했다.

타지에서 만난 동포의 이 사소한 친절이 그날 밤 가장 따뜻한 장면으로 남았다.

라면 국물까지 비우고 나니 후식이 당겼다.

근처 스탠드에서 처음 보는 이름의 구아바 음료를 하나 시켰다.

뽀얗고 밍밍한, 배맛에 가까운 그 맛이 나쁘지 않았다.

컵을 절반쯤 비웠을 때 시계를 보니 남은 시간이 아직 열 시간 가까이였다.

처음 마셔본 구아바 음료
처음 마셔본 구아바 음료

자리를 여섯 번 옮기고 나서야 찾은 명당

사실 숙소비가 아까워서 이동수단 안에서 자려던 적이 이미 여러 번이었다.

그날 아침 나온 페낭의 75 Travellers Lodge도 도미토리가 하루 18링깃이었는데,

그 돈마저 아끼려면 차라리 공항에서 밤을 새우는 편이 나았다.

새벽에 잠들기 전까지는 공항 구석구석을 걸어 다니며 자리를 살폈다.

75 Travellers Lodge 입구, 도미토리 하루 18링깃 안내판
75 Travellers Lodge 입구, 도미토리 하루 18링깃 안내판

배를 채우고 나니 이제 진짜 잠자리를 찾을 차례였다.

충전기가 있는 자리에 바닥을 깔고 앉아봤지만 삼십 분도 못 버티고 철수했다.

쇼핑몰 한복판 벤치로 옮겨 앉아 셀카를 한 장 남겼는데,

사진 속에서는 태연한 척 웃고 있었지만 등 뒤로는 이미 허리가 뻐근해지는 중이었다.

장수돌침대라 부른 쇼핑몰 벤치
장수돌침대라 부른 쇼핑몰 벤치

벤치는 앉아 쉬기엔 좋아도 누워 자기엔 영 아니었다.

이 자리 저 자리로 대여섯 번은 옮겨 다닌 끝에,

새벽 4시부터 아침 세트를 파는 패스트푸드점 옆자리가 배낭을 베개 삼기에 제일 낫다는 결론에 닿았다.

치킨너겟 세트를 하나 시켜 2인용 좌석에 배낭을 기대 눕자, 그제야 하룻밤 잠자리가 완성됐다.

다음 목적지는 스리랑카, 길찾기도 영어도 만만치 않은 나라라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지만,

이런 자리 하나 찾아냈다는 사실만으로도 밤새 버틴 보람이 있었다.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klia2
Kuala Lumpur International Airport Terminal 2 (KLIA2)
지금도 저가항공이 여기로 뜨고 내린다. 노숙 자리는 그때보다 정비가 됐다
영업
24시간
주소
Jalan KLIA 2/1, 64000 Sepang, Selangor, Malaysia
저가항공 전용 터미널이다. 게이트 안쪽보다 출국 심사 전 구역이 밤에 더 조용하다. 24시간 여는 식당과 편의점이 있고, 돈을 쓸 수 있다면 캡슐 호텔도 터미널 안에 있다

공항 노숙 명당 찾기

쿠알라룸푸르 공항은 KLIA(T1)와 klia2 두 터미널로 나뉘는데,

후자가 에어아시아 전용 터미널이라 나처럼 저가 항공을 갈아타는 배낭여행자가 몰린다.

여행자들 사이에서는 T1이 그나마 조용하고 좌석 간격도 넓어 밤새기 편하다는 평이 많고,

klia2는 상대적으로 소음이 크고 팔걸이 없는 좌석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돈을 조금 쓸 수 있다면 캡슐트랜짓에서 3·6·12시간 단위로 캡슐 침대와 샤워 시설을 이용할 수 있고,

출국 심사를 거치지 않고도 묵을 수 있는 사마사마 익스프레스(위성터미널 게이트 C5 인근, 6시간 블록 RM188부터)도 있다.

예산이 더 넉넉하면 klia2 도착층에서 가까운 튠 호텔도 선택지다.

24시간 여는 식당과 편의점이 양쪽 터미널에 꽤 있고,

최근엔 klia2 P 피어(게이트 2·6 인근)에 무료 정수기도 새로 생겼다니

물병 하나 챙겨 다니면 여러모로 편하다.

터미널 이동과 24시간 시설

KLIA와 klia2는 걸어서 오갈 수 없고,

반드시 출입국·수하물 절차를 다시 거쳐야 한다는 점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

이동 수단은 세 가지다.

무료 셔틀버스가 24시간, 10분 간격으로 다니며 편도 10분쯤 걸린다(KLIA 쪽은 메인터미널 1층 4번 출구, klia2 쪽은 게이트웨이 몰 1층 A10 정류장). 가장 빠른 건 KLIA 익스프레스·트랜짓 열차로,

두 터미널 사이는 3분에 RM2다.

에어포트 라이너 버스는 RM2.50에 10분 남짓 걸리고 새벽 5시 30분부터 밤 11시 50분까지 운행한다.

시내(KL Sentral)까지 나가는 KLIA 익스프레스는 편도 RM55(온라인 구매 시 10% 할인)

왕복은 RM100이다.

최신 시간표와 요금은 KLIA 익스프레스 공식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쿠알라룸푸르 공항 기본 정보

KLIA는 1998년 문을 연 메인 터미널이고, klia2는 2014년 문을 연 저가 항공 전용 터미널이다.

두 터미널 사이 거리와 시설 배치가 매번 조금씩 바뀌니,

무료 와이파이·충전기 위치처럼 세부적인 건

도착 전 공식 공지로 한 번 더 확인해두면 헤매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다녀와서

홍콩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나는 시간표까지 짜서 움직이는 여행자였다.

나흘 만에 그 계획은 다 무너졌고,

남이 가자는 대로 따라다니다 보니 공항 바닥에서 자는 것도 아무렇지 않아졌다.

이틀 전 페낭 숙소에서 "여기서부터는 아무데서나 자도 되겠다"고 적어뒀던 그 다짐을,

이날 밤 처음으로 실행에 옮긴 셈이다.

이후 90일 동안 이런 밤이 다섯 번 더 이어졌다.

라면 국물에 몸을 녹이고, 벤치에서 버티고,

결국 패스트푸드점 한구석에서 배낭을 베개 삼아 눈을 붙였던 그 밤이 지금 생각해도 은근히 애틋하다.

돈 없고 시간만 많던 그 시절에만 가능했던 방식이었던 것 같다.

다시 쿠알라룸푸르를 거쳐 갈 일이 생긴다면,

이번엔 캡슐 침대 하나쯤 예약해서 좀 더 개운하게 하룻밤을 보내고 싶다.

그래도 자리를 여섯 번 옮겨 다니던 그 밤은 다시 해보라면 또 할 것 같다.

여기서 하룻밤을 잤다

말레이시아에서 보낸 나흘이 이렇게 끝났다.

다음 편
공항에서 검색해 정한 나라에
9만 2천 원 주고 갔다.
스리랑카 콜롬보, 계획은 없었는데
사람은 하루 종일 만났다.
페낭 · 4편 중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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