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야경 산책, 낮에 스쳐 간 곳을 밤에 다시 걸었다
로마에 도착하고 이틀 동안은 이 도시가 잘 안 맞는다고 생각했다. 덥고 비싸고 사람이 많았다. 그 생각이 뒤집힌 게 이날 밤이다.
바쁘면 실전 정보부터 — 로마 야경 도보 코스 → · 밤에 여는 젤라테리아 → · 야간 대중교통과 안전 →. 우선은 그날 밤 걸은 길부터.
저녁 여덟 시에 다시 나갔다

낮에 바티칸을 돌고 강변까지 걸었으니 그날치는 다 쓴 셈이었다. 그런데 해가 지고 나니 방에 앉아 있기가 아까웠다.
트램을 탔다. 창문이 열려 있어서 바람이 들어왔고, 낮에 걸어서 지나온 길이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갔다. 같은 길인데 앉아서 보니 완전히 다른 동네 같았다.
여름 로마는 밤 아홉 시가 다 되어야 어두워진다. 내렸을 때 하늘이 아직 파랬다.
잔디밭에 앉은 사람들 틈에 끼었다

베네치아 광장에서 내렸다. 흰 대리석 건물 앞 잔디밭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낮에 눈부시기만 하던 흰 대리석이 저녁에는 전혀 달랐다. 해가 낮게 들면서 대리석이 주황빛을 먹었고, 그림자가 조각들 사이로 길게 늘어졌다. 낮에는 과하다고만 생각했던 건물인데 이 시간에는 꽤 근사했다.

옆에 앉은 일행과 자연스럽게 말이 트였다. 한국에서 온 또래들이었는데, 알고 보니 패키지 투어로 묶여서 온 팀이었다. 나 혼자만 자유여행이었다.
그런데도 끼는 게 어렵지 않았다. 남자애들 쪽에 먼저 말을 붙였고, 그 무리를 통해 여자애들과도 금세 섞였다. 다 같이 사진을 찍을 때쯤엔 원래 한 팀이었던 것처럼 됐다. 여행에서 알게 된 사이라 남은 시간이 짧다는 걸 서로 아니까, 다들 마음을 열어놓고 있었던 것 같다.
그날 밤 산책은 그래서 내 계획이 아니라 그 팀의 일정이었다. 나는 가이드가 이끄는 대로 뒤에 붙어 걸었다.

완전히 어두워지자 건물 전체에 조명이 들어왔다. 그 순간을 감상할 새도 없이 서로 사진을 찍어주느라 바빴다.
밤의 판테온이 낮보다 좋았다

거기서 걸어서 판테온으로 갔다. 골목마다 노천 테이블이 깔려 있었다. 낮에 텅 비어 보이던 골목이 저녁이 되니 식당 마당으로 바뀌어 있었다.

기둥 하나하나에 아래에서 위로 조명이 올라갔다. 낮에는 회색이던 돌이 밤에는 따뜻한 색이 됐고, 뒤쪽 하늘은 아직 짙은 파랑이 남아 있었다. 이 조합이 좋아서 한참 서 있었다.

광장에는 낮보다 사람이 더 많았다. 계단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사람, 분수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사람, 그 앞에서 기타를 치는 사람. 낮의 판테온이 관광지였다면 밤의 판테온은 동네 마당이었다.

오벨리스크 끝이 짙은 파란 하늘에 그대로 떴다. 낮에는 배경이 밝아서 실루엣이 안 보였는데, 밤에는 끝의 십자가까지 또렷했다.
나보나 광장에서 물소리를 들었다

판테온에서 몇 골목만 가면 나보나 광장이다. 길쭉한 타원형 광장인데, 옛날 전차 경기장 자리 위에 그대로 지어져서 모양이 그렇다고 한다.
한가운데에 네 강의 분수가 있다. 사방으로 거인 조각이 앉아 있고 그 위로 오벨리스크가 솟은 구조인데, 조명이 아래에서 올라와 조각 근육의 굴곡이 다 드러났다. 낮에 봤다면 그냥 흰 덩어리였을 것이다.

분수 가장자리는 사람들이 빙 둘러앉는 자리다. 나도 거기 걸터앉아 물소리를 들었다. 광장 양쪽 노천 카페에서 나오는 소리가 웅웅거리는데, 분수 앞에 앉으면 물소리가 그걸 다 덮는다.

거기서 강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천사 열 명이 서 있는 다리

산탄젤로 다리는 이날 밤의 정점이었다.
다리 난간 양쪽에 천사 조각이 다섯 씩 마주 보고 서 있다. 각각 다른 물건을 들고 있는데, 조명이 조각 뒤에서 올라와 실루엣이 강하게 잡힌다. 그 끝에 조명 받은 원통형 성이 통째로 서 있다. 낮에 그 앞을 지날 때는 그냥 큰 벽돌 건물이었는데, 밤에는 그게 전부 금빛이었다.
다리 위에는 노점이 몇 개 나와 있었다. 그림을 팔거나 기념품을 늘어놓은 좌판인데, 손님보다 사진 찍는 사람이 많았다.

다리 아래 강물에 조명이 길게 늘어져 비쳤다. 낮에 초록빛 흙탕물로만 보이던 그 강이었다.

같은 자리에서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어느 컷이 나은지 판단이 안 서서 계속 눌렀는데, 지금 보면 다 비슷하다. 그만큼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같이 걷던 팀과는 이 다리에서 헤어졌다.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지면서 각자 갈 방향이 갈렸다. 몇 시간 붙어 다닌 게 전부인데도 헤어질 때는 서로 남은 일정 잘 다니라고 응원을 주고받았다.

자정 가까이 먹은 젤라또

돌아오는 길에 대로를 하나 지났다. 가로등이 끝까지 줄지어 있고 그 끝에 조명 받은 건물이 걸린 구도라, 걸으면서 계속 뒤를 돌아봤다.
그러다 젤라테리아에 들어갔다. 밤 열한 시가 넘었는데 안이 사람으로 꽉 차 있었다.

백사십 년 넘게 자리를 지킨 집이라고 했다. 원래 맥주 공장이었다가 젤라또 집이 됐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다. 실내가 넓고 천장이 높아서 젤라또 가게라기보다 오래된 홀 같았다.

뭘 먹을지 고르지도 않았다. 신나서 그냥 추천해주는 걸로 달라고 했고, 휘핑크림을 산처럼 얹어줬다. 그날 먹은 세 번째 젤라또였는데 이게 제일 맛있었다. 밤이라 안 녹는 것도 한몫했다.

로마에서 젤라또는 나한테 간식이 아니라 예산 항목이었다. 버스 한 번 탈 돈이면 그 구간을 걸어가고 대신 젤라또를 사 먹었다. 다리는 아팠지만 그 계산이 아깝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다.
이 습관은 여행이 끝나고도 안 없어졌다. 지금도 고속터미널역을 지나면 젤라또를 사 먹는 게 나한테는 거의 국룰이다. 그러니까 로마에서 매일 두세 개씩 먹은 건 물가에 밀린 선택이 아니라 그냥 내가 아이스크림을 좋아해서였다.
숙소로 돌아와 그날 있었던 일을 짧게 적었다. 적어놓은 문장이 세 글자였다. 좋다, 로마.
로마 야경 도보 코스
낮에 본 곳을 밤에 다시 걷는 게 로마에서 제일 가성비 좋은 일정이다. 입장료가 안 들고, 덥지 않고, 조명이 낮에 안 보이던 걸 드러낸다.
두 시간이면 도는 순서는 이렇다.
| 순서 | 장소 | 메모 |
|---|---|---|
| 1 | 베네치아 광장·비토리아노 | 해 질 녘 잔디밭에서 조명 켜지는 순간을 본다 |
| 2 | 판테온 | 도보 10분. 광장에 사람이 가장 많은 시간대 |
| 3 | 나보나 광장 | 도보 5분. 분수 가장자리에 앉을 자리를 노린다 |
| 4 | 산탄젤로 다리 | 도보 12분. 이 코스의 정점 |
| 5 | 콘칠리아치오네 대로 | 다리 건너 직진하면 성 베드로 대성당 야경 |
- 조명이 들어오는 시각이 관건이다. 여름에는 밤 9시 전후, 겨울에는 6시 전후. 해가 완전히 지기 직전 하늘이 짙은 파랑일 때가 사진이 가장 잘 나온다.
- 트레비 분수를 넣고 싶다면 판테온과 나보나 사이에 끼우면 된다. 다만 밤 10시 이후에는 분수 앞 유료 구역 운영이 끝나서 오히려 그때가 편하다.
- 걷는 총거리는 4km 남짓이다. 낮에 이미 많이 걸었다면 베네치아 광장까지 트램이나 버스로 가서 거기서부터 걷는 걸 권한다.
밤에 여는 젤라테리아
로마의 젤라테리아는 여름 성수기에 자정까지 여는 곳이 흔하다.
- 팔라초 델 프레도 조반니 파시 — 에스퀼리노 지역. 1880년에 문을 연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젤라테리아다. 규모가 크고 앉아서 먹을 자리가 넉넉해서, 밤늦게 가도 서서 먹지 않아도 된다.
- 판테온 근처의 유명 집들은 낮에는 줄이 길지만 밤 10시 이후로는 훨씬 짧아진다.
- 서서 먹는 값과 앉아서 먹는 값이 다르다. 자리에 앉으면 테이블 요금이 붙는 집이 있으니, 계산 전에 확인하는 게 좋다.
- 진짜 장인 젤라또를 고르는 기준은 색이다. 형광에 가까운 민트색이나 지나치게 노란 바나나는 색소를 쓴 경우가 많다. 통에 산처럼 봉긋하게 쌓아 올린 것보다 금속 뚜껑을 덮어 평평하게 보관하는 집이 대체로 낫다.
야간 대중교통과 안전
- 지하철 막차는 평일 밤 11시 30분 전후, 금·토는 새벽 1시 30분까지 연장된다. 트램과 버스는 노선에 따라 자정 이후에도 다니고, 심야 전용 버스 노선(N으로 시작하는 번호)이 별도로 있다.
- 승차권은 100분권 기준 1.5유로다. 탑승 후 개찰기에 반드시 각인해야 한다. 각인하지 않으면 무임승차로 간주된다.
- 야경 코스 구간(베네치아 광장·판테온·나보나·산탄젤로)은 밤에도 사람이 많아 걷기에 무리가 없다. 다만 사람이 몰리는 곳에서 소매치기가 함께 몰린다. 가방은 몸 앞으로 메고 지퍼에 손을 얹는 정도만 해도 크게 도움이 된다.
- 테르미니역 주변과 인적 드문 강변 산책로는 밤늦게 혼자 걷는 걸 피하는 편이 낫다.
다녀와서
로마가 안 맞는다고 생각한 채로 이틀을 보냈는데, 밤에 걸어보고 나서 판단이 바뀌었다. 도시가 바뀐 게 아니라 내가 본 시간대가 바뀐 것뿐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로마는 덥고 힘들었다. 그런데도 이 도시가 좋게 남은 이유를 따져보면 결국 사람 쪽이다. 유명한 곳을 몇 개 봤느냐보다, 잔디밭에서 말 한 번 붙여서 그날 밤을 통째로 같이 보낸 쪽이 크게 남았다.
그날 만난 친구들과는 지금도 인스타로 연락한다. 그중 한 명은 그 뒤로도 계속 외국에서 지내고 있어서, 가끔 올라오는 여행기를 보다가 아일랜드 편에서 한참 멈춘 적도 있다. 몇 시간 같이 걸은 사이가 십 년 넘게 이어질 줄은 그때 몰랐다.
이후 여행에서는 새 도시에 도착하면 낮에 한 번 걷고 밤에 같은 길을 다시 걷는 습관이 생겼다. 로마에서 배운 것 중에 이게 제일 오래 남았다. 다시 간다면 이번엔 첫날부터 밤 산책을 넣을 것이다.
다음 편은 로마에서의 마지막 며칠이다. 물가에 지갑이 얇아지던 도시에서 한인민박을 만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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